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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김일손

김수로왕 2013. 1. 25. 16:22

[아놀드] 김일손... | 김일손...이종범 교수 2007.12.27

 

연보 
  본관 김해. 자, 계운(季雲). 호, 탁영(濯纓)
  1464년(세조 10) 출생
  1478년(성종 9) 15세 단양 우씨와 혼인. 선산의 이맹전 배알
  1480년(성종 11) 밀양으로 김종직을 찾아가 배움
  1481년(성종 12) 남효온과 함께 원주의 원호를 배알
  1482년(성종 13) 두 형, 김준손과 김기손 문과 급제
  1483년(성종 14) 부친상
  1486년(성종 17) 문과 급제. 남효온과 함께 파주의 성담수 배알
  1487년(성종 18) 가을 진주향교 교수, 함안의 조려 배알
  1489년(성종 20) 11월 요동질정관(1차 북경행)
  1490년(성종 21) 3월 노산군 '입후치제(立後致祭)' 주장
  4월『육신전』첨삭
  9월 김시습·남효온과 중흥사 회합.
  11월 진하사 서장관(2차 북경행)
  1491년(성종 22) 『소학집설(小學集說)』 교정
  10월 충청도 도사, 소릉복위 상소(1차)
  1492년(성종 23) 김종직·김기손·남효온 별세
  1493년(성종 24) 가을 독서당 생활, 「추회부」지음
  1494년(성종 25) 12월 성종 승하
  1495년(연산 1) 5월 시폐(時弊) 26개조 상소 중 소릉복위 주장(2차)
  가을「질풍지경초부(疾風知勁草賦)」지음
  1496년(연산 2) 정월 소릉복위 상소(3차). 3월 모친상
  1498년(연산 4) 봄 「유월궁부(遊月宮賦)」「취성정부(聚星亭賦)」지음.
  7월 능지처사(陵遲處死)
 
  프롤로그
   김일손은 사람을 감동시키는 재덕과 기상을 타고났으며, 백성을 아끼는 성찰과 희망을 담아낸 문장으로 일세를 격동시켰다. 세상을 향한 포부와 소망은 웅대하고 간절하였다. 좋은 스승을 만나고, 의로운 선후배 동료가 있어 서로 힘이 되었으며, 훗날의 재상감으로 기대한 성종도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만큼 분주하였다.
 
  김일손은 현실의 질곡과 훈구대신의 오만이 세조의 정변과 즉위가 빚어낸 어두운 과거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결코 잊지 않았다. 또한 임금 앞의 번듯한 너스레가 부패와 탐욕을 숨기는 거짓의 세월을 언제 마감할까, 나아가 유자의 진정한 길과 관료의 참된 삶이 어떠하여야 하는가를 항상 고뇌하였다. 그만큼 고통의 길이었다.
 
  김일손은 기억하지 못하면 내일이 없고, 올바른 기록이 없으면 시대의 아픔을 극복할 수 없다는 역사투쟁의 선봉이었다.(요즘 친일,과거사 정리를 분열을 조장하여 불필요한 국력낭비라고 보는 견해와 견줘 볼 만한 논리이다.) 특히 사초에 김종직의 「조의제문」전문을 실은 사건은 몰래 부르는 슬픈 기억의 노래를 내일의 희망을 위한 불멸의 서사로 오래도록 살린 쾌거였다.
 
  우리는 김일손의 진실을 향한 기억운동을 신진사림파로 하여금 일시에 세력을 잃게 만든 섣부른 도전 혹은 모험주의로 폄하하고 있다. 더구나 우리는 그가 아름다운 산수와 기암괴석, 심지어 화초조차 겉이 아니라 안에서 풍기는 빛을 찾아야 진정한 경관과 풍경이 되듯, 서화와 음률·문장도 한 개인의 재주이며 풍류이기에 앞서 소통과 공존,진실과 화해의 마당에서 발휘되어야 제 구실을 한다는 새로운 문예관의 한 주인공임을 애써 눈감았다. 이에 그치지 않는다. 그의 역사투쟁이 십대 중반부터 불의의 시대를 거부한 노(老)선비를 찾았던 배움의 길, 그리고 김시습과의 중흥사 회합으로 대미를 장식한 순례의 여정이 낳은 자각의 산물임을 아직도 모른 체하고 있다. 현실의 척박함, 학술의 가벼움이 아쉬울 따름이다.
 
  1. 소통과 침묵
 
  * 아름다운 현장
 
  성종 21년(1490) 여름, 27살의 김일손은 고향인 청도에 있었다. 요동(遼東)에서 우리나라 사람과 중국인 사이에 마찰이 있자 이를 단속하고 해명하는 질정관(質正官)으로 중국에 다녀온 포상으로 휴가를 얻었던 것이다. 마침 김굉필이 찾아와서 가야산 유관(遊觀)을 약속하였다.
   


▲ 자계서원(紫溪書院)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 서원리. 김일손이 생장한 마을에 있다. 본래는 운계리(雲溪里)였는데 김일손이 세상을 떠날 때 마을 앞 운계천이 자줏빛(紫)으로 물들었기 때문에 자계천이 되고 마을도 자계리로 바뀌었고 훗날 서원이 있다고 하여 서원리가 되었다. 김일손의 선조는 김해에서 세거하였는데, 고조가 처음으로 이곳으로 옮겨 살았다. 조부 김극일(金克一)은 동내에서 목족계(睦族契)를 창시하고 인근 자제들에게 『소학』을 가르쳤다. 또한 부모는 물론 두 서모(庶母)에게도 효성이 극진하여 효행으로 정려(旌閭)를 받았다. 부친 김맹(金孟)은 세종 23년(1441)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좌랑, 고령현감 등을 거쳐 세조 치세에 도총부(都摠府)의 경력(經歷)을 지냈다. 이때 도총관이 남이(南怡)였는데, 일화가 전한다. 이때 남이의 집을 찾아가 명함을 내밀었던 휘하 요속(僚屬)들은 '남이의 옥'에 연루되어 죽거나 곤혹을 치렀는데, 김맹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화를 면하였다.『해동잡록』에 나온다. 김맹은 성종 치세에 사헌부 집의를 마지막으로 은퇴하였다. 김일손은 1488년(성종 19) 가을 진주향교 교수를 사임하고, 영귀루(詠歸樓)와 탁영대(濯纓臺)가 딸린 운계정사(雲溪精舍)를 조성하였다. 비록 뜻을 이루지 못하였지만 학자의 길을 가려고 함이었다. 이때 연못은 천운담(天雲潭), 계곡에서 들어오는 물을 활수(活水)라고 하였다. 운계정사가 중종 13년(1513)에 운계서원이 되고, 현종 2년(1611)에 '자계(紫溪)'로 사액을 받았다.
  
  가야산 가는 날을 기다리고 있는데 이웃 고을 영산(靈山)에 사는 부로들이 찾아왔다. 거의 5년을 재직하면서 헌신적으로 민생을 살펴 칭송이 자자한 전 현감 신담(申澹)을 위한 생사당(生祠堂)의 기문을 부탁한 것이다. 김일손도 진주향교 교수로 있으면서 신담의 치적을 익히 알았고, 그래서 성종 19년(1488) 신담이 이임할 때 아쉬움과 고마움을 전한 적도 있었다. 「벼슬을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가는 신담을 전송하다」두 수가 있는데 다음은 첫 번째다.
 
  금학만 가지고 맑은 바람 타고 떠나지만 琴鶴淸風遠
  우리 백성에게 끼친 사랑 오래 남으려니 黔黎遺愛長
  지금 그대 버리고 떠나지만 今君雖捨去
  훗날 이곳이 동향이 되리라 他日是桐鄕
 
  제1행의 금학(琴鶴)은 학을 그린 거문고만 가지고 떠난다는 청렴한 관리의 상징이며, 4행 동향(桐鄕)은 동성(桐城)고을에서 제 고장을 잘 다스린 주읍(朱邑)을 제 고을 사람으로 여기고 거짓 무덤을 만들고 사당을 지어 그리워하였다는 중국 한나라의 고사에 나온다. 신담도 훌륭한 정사를 행하였으니 영산 고을에서도 신담을 제 고향 사람으로 알아줄 것이다, 한 것이다.
 
  이렇듯 신담의 치적을 흠모하고 칭송한 김일손이었지만, 아무래도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하여 사당을 짓고 여기에 자신이 기문 지어야 하다니, 참으로 어색하기도 하고 아무래도 물의를 빚을 것 같았다. 그런데 영산의 부로는 이미 사당을 지어놓고 신담의 화상까지 그려놓고 강권하다시피 하였다. 결국 '신담의 생사당은 비단 한 고을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전하의 치세에 인재가 있어 풍속이 개화(開化)하였음을 증명하는 것이니 기문을 남기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으로 붓을 들었다. 이렇게 마감하였다.
 
  나를 낳은 것은 부모요, 나를 살린 것은 신후(申候)로세. 신후의 덕이여, 하늘이 만물을 낳음과 비길 만하네. 「영산현감신담생사당기(靈山縣監申澹生祠堂記)」
 
  신담의 공적을 하늘의 생민(生民)에 비유한 것이다. 수령이라면 하늘과 같은 생민의 마음으로 백성을 어루만졌으면 하는 바람이 그만큼 간절하였음이겠지만, 지나침이 없지 않았다.
 
  생사당 기문은 곧바로 물의를 일으켰다. 적지 않은 신료가 김일손을 탓한 것이다. 그러나 성종은 옹호하였다. "김일손은 문학(文學)하는 선비이니 반드시 망령되게 짓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학은 요사이 문학의 뜻이 아니라 정치활동 및 영역의 본령으로서의 학술과 문장 즉 학문(學文)이다. 김일손에 대한 신임이었다. 그래도 지나친 과장이 있을지 모르니 진상을 조사하라는 전교를 내렸다.
 
  경상감사 김여석(金礪石)이 치계(馳啓)를 올렸다. 역마를 쉬지 않고 급히 올린 보고였다. 이렇게 되어 있다. '고을의 사민(士民)은 이구동성으로 신담이 청렴하고 어진 마음으로 백성들을 친자식처럼 사랑하였다고 하고, 특히 백성이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를 만큼 흉년이었던 을사년(1485)에 신담은 음식을 짐바리에 싣고 두루 돌아다니면서 굶주리는 자를 만날 때마다 어루만지고 먹였기 때문에 한 사람도 굶어 죽은 자가 없었다.' 김일손의 기문과 다름없는 보고였다.
 
  결국 물의는 진정되었다. 이때 성종이 말하였다. "신담이 끼친 사랑은 헛말이 아닌 듯하지만, 장래 폐단이 있을까 염려가 된다." 분명 우려 섞인 질책이었다. 김일손의 심정이 어떠하였을까? 아아, 너무 가볍게 붓을 놀렸구나, 하였을 것이다.
 
  * 풍경은 마음에 있다
 
  김일손은 '이제 가야산으로 가야지' 하였다. 그러나 바로 갈 수 없었다. 새로 부임한 경상감사 정괄(鄭佸)의 순행을 잠시 따르게 된 것이다. 스승 김종직과 절친한 사이인 데다 지체도 높은 감사의 청을 거절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합천에 당도하니 수령이 객관 동북 편에 연지(蓮池)를 조성하고 호사스럽지도 누추하지도 않은 누각을 지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감사가 달이 뜨는 밤에 누각의 창에 매화나무가 비친다고 하여 매월루(梅月樓)라 이름을 짓고 김일손에게 기문을 부탁하였다.
 
  김일손은 '매(梅)'를 '염매조갱(鹽梅調羹)'으로 풀었다. 상고시대 은나라의 고종(高宗)이 재상 부열(傅說)에게 명령하였다는 '그대가 만약 술과 감주를 빚으려면 네가 누룩과 엿기름이 될 것이며 만약 국에 간을 맞추려면 네가 소금과 매실이 되어라'는 구절 후반에서 따온 것이다. 『서경』「열명편(說命篇)」에 있다.
 
  그리고 '월(月)'의 의미는 『서경』「홍범(洪範)」에 나오는 무왕을 위한 기자의 충고 중 '왕은 한 해를 먼저 살피고, 높은 벼슬아치인 경사(卿士)는 한 달을 먼저 살피고, 낮은 벼슬아치 사윤(師尹)은 하루를 먼저 살피시라'는 구절에서 찾았다. '월'을 '경사유월(卿士惟月)'이라 한 것이다.
 
  김일손은 '매월' 두 글자에서 무릇 통치자는 백성을 위하여 국을 맛있게 하자면 소금과 매실과 같은 구실을 하여야 하며, 최소한 한 달을 미리 헤아려 살펴야 한다는 뜻을 찾아낸 것이다. 이렇게 마감하였다.
 
  꽃이나 새와 같은 깨끗한 아름다움을 조롱하고 맑은 빛을 탐내듯 좋아함은 사람을 소란스럽게 하는 것이니, 매월이란 다만 가지고 놀며 탐할 물건이 아닌 것이다. 「매월루기(梅月樓記)」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기기에 앞서 백성을 위한 좋은 정사가 있어야 진정 자연도 빛이 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한 것이다. 참으로 기막힌 비유이며 소망이며 다짐이었다. 아무래도 감사와 수령은 조금 싸늘하게 들었을 것이다.
 
  김일손은 풍경에 도취하는 가벼움을 경계하였다. 산하의 풍광도 인간과 함께 하였을 때, 또한 인간의 도리를 깨우치고 실천하였을 때 비로소 자연의 가치가 찬연히 빛난다는 생각이었을 게다. 죽령을 넘어 단양 장회원(長會院) 계곡의 이요루(二樂樓)를 찾았을 때였다.
 
  이요루 가는 길은 실로 장관이었다. 김일손은 '가인과 이별하듯' 되돌아보며 갔다. 더구나 누각의 편액(扁額)이 안평대군 글씨였다. '찬연하기가 명월야광(明月夜光)과 같았다.' 지탱할 수 없는 환희에 젖었다. 그러나 한정 없이 풍경에 취할 수도 없었다. 공자의 '지자(知者)는 요수(樂水)하고 인자(仁者)는 요산(樂山)이라'는 가르침이 스쳤을 것이다. 동행한 단양군수 황린(黃璘)에게 토로하였다. "요산요수(樂山樂水)의 가르침을 모르고 산수에 빠져 지나치게 정을 두면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 아닐까?"
 
  「이요루기(二樂樓記)」에 속내를 풀었다. "지혜로운 사람은 낮은 데로 흐르면서 암초 같은 장애를 만나면 피하는 물처럼 세상의 흐름과 사물의 이치를 살피고, 어진 사람은 풍상을 견디며 우뚝 솟은 산처럼 바른 생각을 굳게 지키며 한 뜻으로 세상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술잔을 놀리고 음악을 들으며 '은연하게 솟은 것이 산이로세' 하고, '아련히 흐르는 바가 물이구나' 하면 요산요수(樂山樂水)를 욕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마감하였다.
 
  본성으로 타고난 인과 지를 제 몸으로 체득하고 실행하는 사람은 좋은 뜻을 옮기지 않기를 '산의 고요함' 같이 하고, 한 곳에 얽히지 않기를 '물의 움직임'과 같이 한다. 이리하여 일심(一心)의 덕을 안돈하게 하고 만물의 변화에 두루 통하게 되는데, 이것이 요산요수의 진정한 즐거움이다. 「이요루기」

 

(내 생각...요즘 흔히 노마디즘을 논하면서 정착민의 이주와 유목민의 정착을 말하는데....산과 물로 한사람의 마음에서 인(仁)과 지(知)로도 표현 가능함을 여기서 본다. 노마디즘은 가족의 편안함을 위한 프리렌서를 말하는게 아니라 사유의 자유로움, 성공을 목적으로 하지않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아발전적 사고 소유자를 지칭함을 분명하게 느끼는 구절이다. 최소한 구각을 벗어내는 노력이 어느 때고 있기를...)
 
  아무리 풍경이 멋있어도 마음을 빼앗기면 자연에서 인간의 길을 배울 수 없으니 ...진정 산을 사랑하고 물을 좋아하려면 산처럼 물처럼 의리와 지혜를 체득하여야 한다는 뜻이다.그래서 아무리 멋진 산하의 경관도 바람처럼,아치과 저녁의 빛처럼 변한다는 뜻을 담아 바람과 빛의 경관 즉  풍광이니 풍경 이라고 한다.

그렇다 ! 진정한 풍경사랑은 풍경에 빠져 자신을 잃은 것이 아니라 풍경과 함께 삶을 알차게 꾸미는 몰아일체의 자아완성인 것이다.(풍경은 마음이다.)
 
  * 한여름 밤의 꿈
 
  김일손은 마침내 가야산에 들어섰다. 해인사를 만났다. 그런데 김굉필은 아직 오지 않았다. 이제나 저제나 하면서 가야산 아래 합천 야로현 처가에 머물렀을 것이다. 조법사(祖法師)는 친절했다. 그런데 최치원이 한때 선유(仙遊)하던 장소가 어딘가 물었는데, 조법사는 사우(寺宇)를 짓는 데만 열중할 뿐 그곳이 어디인가는 모르고 있었다. 아니 관심이 없는 듯하였다. 거슬렸다.
 
  김일손이 한참 올라 중턱에 이르니 연못이 있고 암자 두 채가 호젓하였다. 노승이 마중을 나왔다. 저 멀리 지리산이 보이는 듯하였다. 아, 저 산을 작년 초여름에 정여창과 함께 올랐지, 감회가 새로웠을 게다.
 
  그제야 김굉필이 나타났다. 한때 이곳에서 공부도 하며 왕래가 있었던지 노스님과 친숙하였다. 서로를 소개하였다. 옥명(玉明) 장로라 한다. 스승 김종직이 해라(海螺)를 제대로 연주한다고 하여 '나화상(螺和尙)'이라고 불렀던 당대의 고승이었다. 왕실에서 회암사의 주지로 초빙하였지만 한 해 가량 머물다 내려왔다고 한다. 불교를 탄압하며 어우르던 시절, 쉽지 않은 일이었다. 친근했다.
 
  노승도 김일손의 성명을 익히 들었던 차라 무척 반가워했다. 연못의 이름이 '득검지(得劍池)'가 된 내력을 말했다. 스님이 연못을 파는데 옛 검이 나왔다는 것이다. 가야산 아래 터가 야로현(冶爐縣)인 것으로 보면 옛 적 이곳에서 쇠를 녹여 검을 만들었든지, 아니면 신라와 백제 또눈 가야 사이의 전쟁이 남긴 유물이었을 것이다.
 
  두 채의 암자에 걸린 나월헌(蘿月軒)과 조현당(釣賢堂)이라는 편액이 눈에 띄었다. '나월'은 몽라파월(蒙蘿把月) 즉 달이 덩굴에 걸려 있어 잡을 수 있다는 뜻이다. 덩굴에 비치는 달을 본다는 것이니 산중 암자의 이름으로 그럴 듯하였다. 무척 좋았다.
 
  그런데 어진 사람을 낚는다는 '조현(釣賢)'이라니? 스님이 설명하였다. "현자란 지금의 현자가 아니라 옛날 현자라오. 자줏빛 옷 입고 이름을 내는 현자가 아니라 청운에서 도를 사모하는 현자를 말함이지요." 그리고 최치원의 숨은 뜻을 은근히 보이며, 도잠(陶潛)이 깊은 산중에서 금족(禁足) 수행을 하던 스님을 만났는데, 스님이 배웅하다 무심코 계곡을 넘어서자 호랑이가 울었다는 '호계(虎溪)'의 고사까지 덧붙였다. 맑고 아름다운 이름을 남긴 은자와 고승의 이야기를 통하여 선비와 스님이라도 한마음으로 옛사람의 어질고 착함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일손은 감탄하였다. "능히 마음은 천고(千古)에 노닐면서 홀로 착하게 살며 산림에 숨었구나." 암자의 벽에 서거정·김맹성·유호인·표연말 등 당대 문사의 시를 적은 현판이 많은 연유도 알 것 같았다. 물론 김종직의 시가 가장 많았다. 스님의 시도 있었다. 실로 호걸의 스님이었다.
 
  밤이 되어 웃옷을 벗으니 추위가 느껴졌다. 스님이 해라를 불며 「나월독락가(蘿月獨樂歌)」를 읊었다. 세상을 즐기며 자신과 사물의 얽힘을 떨쳐내는 노래였다. 그리고 너울거리는 소매에 계수나무 그림자가 드리운 듯 춤을 추었다. 미투리를 벗으니 속진(俗塵)을 온통 털어버린 듯하였다. 한 여름의 피서!
 
  김일손은 스님의 부탁으로 「조현당기(釣賢堂記)」를 남겼다. 피서 중의 글짓기, 아름다운 만남을 들춰냈다. 떠나옴이 아쉬움이었다. 「나화상과 헤어지며」가 있다.
 
  고운이 살던 동구에 봉우리 겹쳐 있고 萬疊孤雲洞
  산 위에는 이름난 사찰이 있다네 名藍擧上頭
  해라 불자 잠자던 새 놀라 깨어나니 螺鳴驚宿鳥
  옛 검은 차가운 땅속에 숨어 규룡으로 변했을까 劍化蟄寒虯
  보이는 곳 강과 산의 끝이러나 眼界江山盡
  가슴에 하늘과 땅이 흐르고 胸襟天地流
  다리 옆 꽃과도 말을 통하니 橋邊花欲語
  호계에 노닐다 웃음으로 답하였네 應笑虎溪遊 
  김굉필은 산행과 휴식 내내 조용하였다. 김일손이 "인간계와 다른 산중 별천지가 아닌가?" 하여도, "한 달을 같이 있었으면 좋겠다" 하여도 도통 말이 없었다. '그대 앞에 국사가 기다리는데 왜 그러시는가?' 하였을까. 혹여 '아무리 아름다움이라도 마음을 놓쳐서는 아니 되지' 하였는지 모른다. 김굉필은 그런 사람이었다. 묵묵히 묵상하는 그래서 은근한 위엄이 있었다.

(내 생각... 불교는 침묵과 신비주의인 초월성을 몸에 지니고 자아성찰을 통한 자기 비움을 실행하고,

               선비는 고뇌와 호연지기를 몸에서 떨어지지 않게 거경궁리를 통한 자기 완성을 실행한다.)

 

삶과 글의 일치
 
  김일손은 문장을 지엽적 기예로 생각하였다. 도본문말(道本文末) 내지는 '문장은 도를 담는 그릇이다'는 재도문학론(載道文學論)에 충실한 것이다. 그러나 문장의 효용성은 결코 가볍게 보지 않았다. 문장이 아니면 도를 드러낼 수 없다는 입장인 '...도문일치론(道文一致論)'에 보다 가까웠다. 「권오복(權五福)의 관동록(關東錄)에 붙이다」에 나온다.
 
  사장(詞章)은 특히 말기(末技)일 뿐이다. 그러나 도(道)가 있으면 반드시 말[言]이 있고 말이 정갈하여 사람을 감발(感發)시키면 시가 된다. 그러니 사장이 도에 배치되는 것은 아니다.

(내 생각....시란 그 당시에 넘쳐나는 감정이 글로 흘러 나오는 것인데,

                      유학자는 도가 넘치는 것으로 그러면 감동을 불러 일으킨다고 보는구나.)
 
  권오복은 호가 수헌(睡軒)으로 '그대 간담이 나의 간담이고, 흉중의 호발(毫髮)이라도 서로 감추지 않고 드러낸다'고 할 만큼 서로 막역한 사이였다.
 
  김일손에게 좋은 글은 유희가 아니라 도를 드러내고 사람을 감동시키는 글이었다. 문장의 가치를 삶과 글의 일치에 두었던 것이다. 김일손이 보기에 권오복의 글이 바로 그랬다. "어찌 시로만 볼 것인가? 조금도 연월(烟月)을 조롱하는 것을 일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충과 효를 향한 성정이 그대로 드러나 손에 잡히는 듯하다."
 
  문장이 도의 말기이며 또한 기예라는 생각은 권오복도 마찬가지였다. 김일손이 소과에서 장원하였을 때 지은 「장원 김일손에게 올린다」에서
 
  수식하며 다듬는 일 본래 폐와 간을 괴롭히는 법 雕篆從來困肺肝
  문장은 작은 기예니 돌아볼 것 없다네 文章小技不須看 
  하였다. 김일손도 반가웠다. "문자로 그대 아양을 따르지 않으리니 임천에서 끝까지 살아도 내 몸은 편하다네." 마치 '그대가 비록 좋은 글로 나의 장원을 축하하지만 나는 문장으로 그대의 칭찬에 답하지 않으리라' 하는 듯하다. 믿음과 정감이 넘친다.
 
  김일손은 문장을 위한 문장, 즐거움을 위한 문장을 싫어하였다. 김일손의 문장은 세상에 대한 고뇌, 묵직한 성찰을 담고 있지만 항상 경쾌하였다. 또한 경사의 해박함을 자랑하지 않는 담박함이 있었고 인간의 아름다움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담았다.
 
  싸늘한 감상
 
  김일손은 기문이나 서문 혹은 발문 등을 많이 부탁받았다. 일세의 문장으로 대우받은 것이다. 이럴 때면 보고 듣고, 알고 생각하는 바를 솔직하고 꾸임 없이 써내려갔다.
 
  성종 22년(1491) 8월 병조좌랑 겸 교서관 박사로 봉직하며 『자치통감강목』을 교정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승지이던 강구손(姜龜孫)이 증조부 강회백(姜淮伯)이 심은 '정당매(政堂梅)'에 얽힌 사연을 여러 문사에게 말하고 시문을 구하여 한 권을 엮고서 김일손에게 말미(末尾)를 요청하였다. 후록(後錄) 혹은 발문이었다.
 
  김일손은 이미 '정당매'를 알고 있었다. 정여창과 지리산에 가면서 단속사에서 보고 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내력부터 담담하게 풀었다. 바로 「정당매(政堂梅)의 시문 뒤에 적다」였다.
 
  단속사 앞뜰에 두 그루 매화가 있었는데, 한 그루는 밑둥치가 절반은 썩어 들어간 고목(枯木)이고 한 그루는 한 십 년이 되었다. 오래된 매화는 젊은 시절 절에서 공부하던 강회백이 심었는데, 훗날 의정부 이전의 최고 권부인 문하부(門下府) 2품 벼슬인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랐기 때문에 절에서 '정당매'라 이름을 지었고, 다른 한 그루는 강구손이 부친 강희맹의 명을 받고 선대의 유적을 살피러 갔다가 심었다. 
  

 
▲ 정당매(政堂梅) 수령 630년이 되었다는 산청군 단속사지 안 매화나무에도 봄을 맞아 꽃 몽우리가 맺혔다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운리 단속사 옛터. 8세기에 창건되어 솔거(率去)가 벽화를 남겼다는 사실로 유명한 단속사는 지금은 절터만 있다. 동서로 배치된 삼층석탑이 보물 제72호와 제73호이다. 사명대사 유정(惟政)이 젊은 시절 잠시 단속사에 머물렀는데 인근 산천재(山天齋)에 살던 말년의 조식을 만났다. 이때 조식이「유정 스님에게」란 시를 주었는데 "이별할 때를 잘 기억해 두게나, 정당매가 푸른 열매 맺었나니" 하였다. 정당매에 대한 어떠한 생각도 없는 듯하다. 그러나 아니었다. 「단속사의 정당매」란 다른 시에는 "조물주가 추위에 절조를 지키는 매화의 일을 그르쳤나니, 어제도 꽃피고 오늘도 또 꽃을 피웠구나" 하였다. 정당매를 보면서 고려 말에 출사하여 조선에서도 승승장구한 강회백의 처신이 생각났던 것이다. '정당매'는 고려 말 하즙(河楫)이 심은 단성면 남사리 여사촌 분양고가(汾陽古家) 소재의 '원정매(元正梅)', 그리고 조식이 61세에 산청군 시천면 원리에 산천재(山天齋)를 조성하고 심었던 '남명매(南冥梅)'와 더불어 '산청삼매(山淸三梅)'로 꼽힌다.ⓒ산청군
  

  강구손 가문은 당대의 훈구명가였다. 조부 강석덕(姜碩德)은 세종과 동서지간이었고, 부친은 경사(經史)와 전고(典故)에 통달했으며 『금양잡록(衿陽雜錄)』이라는 농서까지 남긴 강희맹(姜希孟)이며 화가로도 유명하여 삼절로 이름이 높은 강희안이 백부였다. 성종의 즉위로 진산군(晉山君)으로 봉호(封號)된 강희맹이 강회백과 강석덕(姜碩德) 그리고 강희안(姜希顔) 3인의 시문을 모은 『진산세고(晉山世藁)』를 세상에 보였을 때, 세간에서는 당대 최고의 가승문집(家乘文集)으로 손꼽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 서문을 바로 스승 김종직이 지었다. 강구손도 김종직에게 배운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강구손과 김일손은 동문인 셈이다.
 
  김일손 역시 가문의 성망(盛望)을 모르지 않았기에 '강회백만이 자손을 둔 것이 아니라 그가 심은 매화까지 자식을 두었다' 하며, '풍류(風流)의 높은 품격을 상상할 만하다' 하였다.
 
  사람은 가지만 때는 머무는 것이고, 일은 지나지만 이름은 남는 것이니 궁벽의 산중 끊어진 계곡의 옛 고목에서 새 가지가 나와 차가운 그림자로 서로를 상대하게 되었으니 어찌 감회가 없을 것인가. 「정당매시문후」
 
  자신에게 발문을 부탁한 강구손의 뜻을 헤아린 것이다. 여기까지는 풍경에 대한 활발한 소묘였다. 구태여 말하면 풍경의 문장이었다.
 
  그러나 '조물주(造物主)는 본래 마음이 있는 것을 싫어하는 법이다' 하면서부터는 달랐다. 먼저 당나라 사람으로 화석(花石)을 좋아한 이문요(李文繞)가 수도 없이 끌어 모았다가 이 때문에 자손을 수고스럽게 하였다는 고사를 인용하며 적었다. "선세의 유지(遺趾)를 추모한다고 하여 초목 때문에 고역(苦役)을 치르면서 또한 후손에 남긴다고 하는 것은 결코 조물주의 이치에 도달하는 길이 아니다." 하늘이 사물이나 인간을 낼 때 아무런 작위가 없고 의도하는 바가 없다는 것을 새삼 들추면서 초목 사랑이 지나치면 자손에게 수고를 끼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그치지 않았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의 피어남과 메마름과 살고 죽음은 모두 조물주의 처분에 따른 것이니, 비록 사람에게 맡겼다고 하여도 사람의 꾀를 허용하지 않는 법, 이를 모르면 조물의 유위(有爲)를 훔쳐 자기 것으로 삼으려는 것이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도 하늘의 조물주가 정한 운수를 받았는데, 작위적으로 생명을 관장하겠다는 생각으로 억지로 키우려는 꾀를 부리는 일은 부질없다, 한 것이다. 그리고 당부하였다.
 
  매화로 선조의 뜻을 이어가는 것은 괜찮지만 이 매화를 잊지 못하고 지나치게 사모하다가 시들거나 부러질까 걱정된다.
 
  진정한 조상 추모는 무절제한 완물(玩物)·완상(玩賞)이 아니라 조상이 물건을 남길 때의 마음을 음미하는 완심(玩心)에 있다는 것이다. 민생을 생각하지 않는 취미는 하늘의 뜻은 물론 조상을 추모하는 길이 아니라고 하는 듯하다. 그러니 서늘하다. 조상 추모와 가문 품격을 자랑하고 싶었던 강구손이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차가운 사랑
 
 완상의 경계,완심의 추구를 향한 김일손의 생각과 마음은 임금 앞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물욕을 경계, 바른 마음 추구)
  일찍이 자기의 별장인 비해당(匪懈堂)의 풍물을 칠언율시로 읊은 안평대군이 당대 문사인 최항·신숙주·성삼문·김수온·서거정·강희맹 등으로 하여금 따라 짓게 한 적이 있었다. 이때 풍물이 마흔여덟 가지나 되었기 때문에 「사십팔영(四十八詠)」이라고 하였다. 안평대군이 꿈에 본 비경을 안견(安堅)으로 하여금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로 그리게 하고 여러 문신에게 시문을 구한 사건과 더불어 한 시절 문치의 융성을 상징하는 문화적 사건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수십 년. 이번에는 성종이 안평대군의 시에 차운하고 이를 따라 최고의 문사들인 홍귀달·채수·유호인 등에게 짓게 하였다. ...성종 치세의  「사십팔영」의 탄생이었다. 그만큼 문치의 기운이 활발하였음을 과시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김일손도 포함되었다. 성종 24년(1493) 8월 임금이 내린 휴가를 이용하여 호당에서 독서를 하고 있을 때였다.
 
  이 중에 「해를 향한 해바라기(向日葵花)」가 있다. 햇빛 따라 움직이다 해가 지면 고개 숙이는 해바라기는 흔히 임금(해)을 바라보는 신하의 충절, 마음가짐으로 비유되곤 하였다. 다음은 성종의 노래인데 후반부만 옮긴다.
 
  그윽한 향기는 가장 먼저 시인의 배를 채우고 幽香最入詩人腹 

  농염한 넉넉함은 가녀의 입술을 가볍게 하지만 濃泰還輕歌女脣
  낮은 처마 너머로 고개 쳐드는 것은 충절을 드러내는 것이라 開向小軒忠節著
  한 떨기가 응달 산에 있어도 이름 있는 자들을 꾀일 만하여라 陰山一朶噉名人
 
  해바라기와 같은 충절이 그대들에게 있는가, 묻는 듯하다. 그러나 의심이 없고 걱정이 없다. 자신의 치세에 대한 자족함이리라. 김일손이 따라 읊었다.
 
  꽃무리 퍼지자 고개 숙임 자랑스러워라 鵝暈初勻誇點額
  씨앗 보이며 살짝 입술을 반쯤 여네 犀瓠半露見開脣
  그대 천성이 하늘을 향하고 있음을 알면 知渠向日元天性
  주인 배반하는 일이 천추의 부끄러움 남길 것을 알아야 하리 愧殺千秋背主人
 
  해바라기만한 충절을 드러내지 못하는 신하가 없지 않음을 은근히 꼬집는 듯하다.
 
  임금의 시에 차운한다는 자체가 광영이었다. 문재가 당대 일류임을 임금이 인정하고 또한 임금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음을 증빙하고 과시하는 기회였던 것이다. 김일손도 광영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무언가 서운하였다. 시로 다하지 못한 감회를 「사십팔영의 발문」에 풀었다.
 
  김일손은 시의 형식을 칠언율시로 정한 것부터가 탐탁하지 않았다. 당나라 시대에 처음 나온 율시가 차츰 형식에 구애되면서 성정의 표현을 자못 제약하게 되었다고 진단하였다. 즉 형식이 내용을 구속하면 시병(詩病)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집 주위의 풍물이 어찌 마흔여덟 가지나 될 수 있는가, 물었다. 즉 '자미(紫薇)와 백일홍(百日紅)' '산다(山茶)와 동백(冬柏)'은 본래 한 가지인데 민간에서 달리 부른다는 사실을 모르고 둘로 나누는 식으로 초목과 화석, 그리고 경치를 억지로 만드니 마흔여덟 가지나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성정의 도야에 보탬이 되지 않고 세상의 이로움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고 하였다.
 
  마침내 「사십팔영」을 이렇게  규정하였다.

"마음을 즐기고 마음에 노니는 완심이 아니라

사물에 빠져 마음을 빼앗기는 완물의 유희이며, 음풍농월에 지나지 않는다."

 

언뜻 안평대군에 대한 혹평으로 들으면 무관하지만 임금도 비판에서 자유스러울 수는 없었다.

무척 당돌한 언사였다. 그것은 임금에 대한 무례와 오만으로 비칠 수 있었다. 그러나 개의치 않았다.
 
  꽃보다 사람이 아름다워라
 
  김일손은 화초 사랑, 풍경 심취의 노력을 세상과 사람에 바쳐야 한다고 하였다. 아니 그런 정도 정성이 있으면 충분히 할 수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예쁜 화초 중에 중국에서 들여온, 특히 원나라 공주가 고려의 왕에게 시집 오면서 가지고 온 화초가 잘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풀었다. "오호라! 식물은 풍토와 원근을 분간하지 않고 능히 자라 오래 살아감이 이러한데 왕도는 어찌 중하와 이적, 대국과 소국 사이에 틈이 있겠습니까?" 본래 다른 곳에서 생장하던 화초가 풍토가 다른 우리나라에서 잘 자라는 것처럼 임금의 바른 길과 좋은 세상을 이 땅에서 이루지 못할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문치(文治) 백 년,교육과 양성이 오래되었는데 큰 산과 깊은 계곡 사이에 어찌 뜻을 숭상하는 선비가 없어 조정의 벼슬 명부에 이름을 올리지 않고 있겠습니까? 장차 세상의 어진 사람을 숭상하는 바가 화훼에 미치지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화초와 풍광을 사랑하듯이 인재를 살피고 아끼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과거와 문음으로만 인재를 등용하지 말고 옛적의 제도인 향천(鄕薦)·향거(鄕擧)를 부활할 것을 제안하였다. 향촌의 여론을 들어 먼 시골, 깊은 산중에 숨어 있는 인재를 찾아내 발탁하자는 것이었다.
 
  나아가 김일손은 화초와 암석의 풍경에서 인간 생활과 국가 정치의 교훈을 찾을 것을 건의하였다. "사물마다 일종의 의사가 없는 바가 없으니 이를 보며 만물의 삶의 의지[生意]를 살피시며 어진 마음을 기르시고 이를 보고 덕의 향내를 본받으려 하시며 요염함을 경계하소서." 예를 들었다. 풍상에도 변하지 않는 송죽을 보고 군자가 지키려는 절조를 알아야 하고, 낭떠러지와 골짜기의 그윽하고 고요한 바위에서 은사가 벼슬을 구하지 않는 취향을 엿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물에 따라 바른 이치를 얻어가는 '수물격득(隨物格得)' 즉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길이었다.
 
  이때 김일손의 나이 갓 서른 살, 노성(老成)의 준엄함이 느껴진다. 이러하니 시의 향내가 달랐다. 시격(詩格)의 차이였다. 다음은 「해남의 옥돌」전반부다. 해남의 옥돌은 바다가 훤히 보이는 미황사가 있는 달마산에서 많이 나온다. 성종이 읊었다.
 
  푸른 바다에 내린 쇠줄을 구름 끝에 매달고 滄溟鐵索繫雲根
  갈고리로 옥 뿌리를 긁어 파니 푸른 빛깔이 드러나네 鉤出蒼然玉樹痕
  푸른 이끼 더덕더덕 고기비늘이 움직이는 듯 苔鮮磷磷漁甲動
  촛불처럼 밝은 빛이 물무늬에 비치듯 하네 輝光燭燭水紋奔
 
  성종은 옥돌을 캐는 웅장함, 바다의 빛깔을 담아내는 옥돌의 아름다움을 노래하였다. 김일손은 달랐다.
 
  번들거림은 군자의 덕만큼 사랑스러워도 愛潤可方君子德
  기물 좋아함은 높으신 제왕이 경계할 일 好奇當戒帝王尊
  어리석은 사람이 아녀자 유혹하는 노리개나 된다면 癡人作佩媚兒女
  차라리 경전을 사서 후손에게 물려줌이 어떠할지 何以買經遺後孫
 
  옥돌의 아름다움에서 군자가 갖추어야 할 도덕을 찾고 사치품을 경계하는 뜻을 담았다. 그러면서 옥을 사는 비용으로 경전을 사서 보급함이 났다고 하였다.
 
  풍물과 산하에서 하늘의 이치와 사람의 마음을 읽는 김일손의 시선은 「눈잣나무」에서는 이렇게 발전한다.
 
  백 척까지 너울대며 구름 위까지 솟을 텐데 婆娑百尺勢凌雲
  마른 껍질 성긴 수염은 아직도 그윽한 향기 품어내니 瘦甲疏髥送暗芬
  달 밝은 밤 학이 머물기 좋겠다만 好得月明留鶴羽
  일찍이 벼락 맞아 용무늬마저 갈라졌구나 曾經雷霹坼龍文
 
  서역이 원산지인 '눈잣나무'는 고산지대에 분포하여 온대에서 잘 자라지 않는 만년송(萬年松)인데, 관상과 분재(盆栽)에 제격이다. 그런데 김일손은 만년송을 보는 순간 세상을 만나지 못한 인재, 그리고 꺾이는 운명을 타고난 안타까운 인재가 먼저 들어왔다.

 

와유미학(臥遊美學): 그림에 들어앉다
 
  김일손은 냉정하여 아름다움에 소홀한 듯이 보인다. 그러나 아니었다. 무척 글씨와 그림을 좋아하고 문예의 힘을 믿었다.
 
  성종 20년(1489) 겨울 요동질정관(遼東質正官)으로 북경에 갔을 때였다. 임무를 수월하게 끝내고 여유가 있었다. 옥하관(玉河館)이라고도 하는 오만관(烏蠻館)에 머물며 서책을 구입하는 등으로 소일하였다. 오랜만의 휴식, 북경의 휴일이었다. 그런데 숙소 근처에 사는 하왕(何旺)이란 사람이 김일손의 취미를 눈치 채고 도서(圖書) 즉 그림과 글씨를 자꾸 보였다. 그러나 마음에 들지 않아 시큰둥하였다. 그런데 귀국이 내일 모레인데 '열네 폭짜리 고화(古畵)'를 가져왔다. 가격 흥정에 여유를 두지 않아 이익을 보려는 속셈이었을 것이다.
 
  김일손은 '자신도 모르게 좋아 탐이 났음'을 숨기지 않았다. 사고 싶다는 마음을 드러내면 절대 유리한 고지에 설 수 없다. 더구나 경전을 비롯한 여러 서책을 사느라고 여비를 거의 써버린 터였다. 여러 옷가지를 내주었다. 그래도 부족하였다. 결국 황제가 내린 명주 두 필까지 내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작품이 너무 좋아서 개의치 않았다. 배웅하는 중국 관리도 보증하였다. 중국행 '제일소득'이었다. 이러한 사연을 「중국의 병풍에 적다」에 담았다.
 
  김일손은 서화를 보는 안목이 있었다. 정여창과 지리산을 갔을 때도 안평대군의 가섭화상을 금방 알아보고 가져오려다 정여창의 만류로 그만둔 적이 있었다. 강혼의 시를 화제(畵題)로 삼아 이종준이 그린 팔 폭 그림을 보고 화평을 남기기도 했다. 이렇게 시작한다. "서화와 시문은 흉중에 품은 토저(土苴)가 없다면 어떻게 화려한 빛깔[華]이 나오겠는가?" 토저는 거름이 되는 두엄풀인데, 서화와 시문의 아름다운 빛은 가슴에 품은 기운을 거름 삼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눈과 달과 바람과 연기를 배경으로 한 매화와 대나무의 모습을 눈에 휘늘어진 가지와 줄기, 달이 옮겨오는 향기와 그림자, 바람에 뽐내는 잎사귀와 꽃술, 연기에 숨어버린 고운 빛깔로 소묘하며 감상을 적었다.
 
  고요하고 막막한 듯, 시원하고 깨끗한 듯, 높고 밝은 듯, 확 트이고 맑은 듯하다. 붓끝의 조화를 보면 분명히 정갈하고 차분하며 씩씩하며 편안하니 그의 뜻과 생각이 이러함이라. 여덟 폭 병풍 가운데 앉아 있노라니 알지 못하는 사이에 중균의 가슴속에 들어가는구나. 아, 우리 중균이여.「이종준의 그림에 적다」

 

  김일손의 감상법은 조망이 아니었다. 그림을 따라 노니는 유관(遊觀), 혹은 그림 속에 드러누워 즐기는 와유(臥遊)였다. 이 병풍을 지금에 볼 수 없음이 정녕 안타까울 따름이다.

( 사물이든 그림이든 느끼는 방법;; 의미 모르고 봄,의미를느끼서 봄, 희열,감명 받음, 물아일체.)
                                                            ( 경치 볼땐 ;;관조 ㅡㅡ>침잠ㅡㅡ>몰입.)

                                                            ( 그림 볼땐 ;;조망 ㅡㅡ>유관ㅡㅡ>와유.)

 

그러나 김일손은 항상 작품에 드러눕지만은 않았다. 언젠가 박눌(朴訥)의 글씨를 품평한 강혼(姜渾)의 글을 보았을 때였다. 당대 명필인 박경(朴耕)의 아들 박눌 또한 한 획 한 획에 기운이 돌고 넋이 서린 듯 서체가 웅장하고 활달함에 감탄하였다. 그러나 박경이 서자 출신인데다 무척 가난한 탓에 박눌 역시 진취를 생각할 수 없었다. 김일손은 안타까웠다. 「박눌의 글씨에 적은 강혼의 발문 뒤에 적다」에 적었다.
 
  만약 이 아이가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으면 반드시 세상에 드러나지 말라는 법이 없고 또한 기쁜 일 많은 고장에 태어났다면 학사(學士)와 노유(老儒)가 소중하게 여겨서 왕공(王公)의 아낌을 받지 말라는 법이 없을 것인데, 헐벗고 배고픔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국법에 구애(拘碍)되고 인재의 능력을 존중하지 않은 나라의 습속이 애석할 따름이다.
 
  능력보다는 관습을 따지고 적서의 차별이 심한 나라가 인재를 키우지 못할 뿐 아니라 헐벗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렇듯 박눌의 글씨에서 세상의 질곡, 아웃사이더의 고통을 엿보았던 김일손의 세상에 대한 사랑이 깊고도 넓었다. 그것은 문명과 소통을 향한 바람으로 표출되곤 하였다.
 
  제2차 중국행
 
  성종 21년(1490) 11월 김일손은 다시 북경에 갔다. 진하사(進賀使)의 서장관(書狀官)이었다. 정사와 부사를 보좌하며 사행의 기록과 보고를 담당하는 직임인데, 하급 관원에 대한 규찰을 담당하는 행대어사(行臺御使)를 겸하였다. 요동질정관으로 다녀온 지 1년 만이었다. 그때 중국에서의 소감을 「지난 여행의 감회를 노래하다」에 담았다.
 
  이렇게 시작한다. "수레와 말이 넘쳐나 오르고 내리며, 번화한 문물 백 년의 성대함을 자랑하는구나." 북경의 번화함을 묘사한 것이다. 그러나 인재를 만날 수가 없었다. 그때의 정경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도포 입은 선비들 몰려들어 來縫掖之貿貿兮
  군자 소인 뒤섞여 괴상한 것만 물어보며 相怪問兮雜薰蕕
  짧은 글 주면서 사귀자고 청하니 贄短章而求友
  밝은 달을 어둠에 던진 듯 부끄럽기만 하였네 愧明月之暗投
 
  도포를 입었으나 군자인지 소인인지 알 수 없는 무리들이 조선에서 온 자신에게 괴상한 잡담만을 늘어났다는 것이다. 무척 서운하였다. "개미 같은 내 인생 한스럽구나." 더구나 만나는 사람마다 재물만 좋아하는 것 같았다. 문명과 도덕의 괴리였다.
 
  시대 만나지 못한 현사를 저자에서 찾았으나 訪屠狗於市上
  노래 끊겨 슬프더라 누구와 수작할까 悲歌斷兮酬與酬
  풍속과 교화가 시대에 따라 변하더니 俗與化而推移
  사람도 천해져서 재물만 더 좋아하더라 人向下而益偸
 
  어쩌면 서책을 비싸게 팔려고 드는 상인이나 뇌물을 바라는 중국 관리를 만났는지 모른다. 그래도 자신의 안목이 부족한 것은 아닌가, 반성하여 '내가 두 눈을 가지고서도 혼자 지극한 덕의 세상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였다. 또한 어쩌면 중국의 학자들은 조선의 사신을 어리석은 '비부(鄙夫)'로 여기고 있을지 모른다는 자괴감도 들었다.
 
  그러던 차에 예부(禮部) 원외랑(員外郞)인 정유(程愈)를 만났다. 『소학』의 여러 주해를 모은 『소학집설(小學集說)』의 편찬자였다. 정유는 「주자서첩(朱子書帖)」한 점까지 선물로 주었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소학의 인간상이다' 하였다. 그리고 순천부(順天府)의 학사(學士) 주전(周銓)과 사귈 기회를 잡았다. 박학하고 차분한 인품이 좋았다. 패도(佩刀)를 정표로 기증하자 주전도 여러 권의 도서(圖書)를 건넸다. 아낌없는 만남이었다. 훌륭한 인재를 너무 늦게 만난 것이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김일손은 귀국하여 『소학집설』을 나라에 올렸고 성종은 교서관으로 하여금 인쇄하여 널리 보급하도록 하였다.
 
  교류와 소통을 향한 열망
 
  김일손은 정유와 주전을 만나기는 하였지만 처음부터 중국의 인재들과 폭넓게 교유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왜 좋은 기회를 놓치게 되었을까? 절친한 후배 이목(李穆)이 성종 25년(1494)에 북경으로 떠나자 그러한 사정을 자세히 일러주었다. 먼저 예전의 중국은 변방 열국의 자제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우리나라도 얻은 바가 많았고 문헌도 적지 않게 가지고 왔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한 사실을 지적하였다. 문명의 교류와 소통이 막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대의 탓만 할 수는 없다.
 
  예로부터 중국의 학문과 도덕의 인사는 하남성(河南省) 강소성(江蘇省) 그리고 절강성(浙江省) 출신이 대부분이라고 하는 사실만을 알고, 천하의 수도가 된 연경에 인재가 모인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인재를 찾지 못한 불찰을 반성하였다. 또한 이들을 만나기 쉽지 않았던 이유도 살폈다.
 
  조정에 있는 재위자(在位者)는 남과 사귀는 외교(外交)를 싫어하고 벼슬을 하지 않는 재야자(在野者)는 시가(市街)에서 쉽게 만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내가 구도(求道)의 간절함이 있더라도 만나기를 심히 꺼려한다. 「지난 여행의 감회를 노래한 다음에 적다」
 
  조정의 인재를 만날 수 없음은 공무가 아니면 사교를 멀리하기 때문이고, 재야의 인재는 시가를 잘 다니지 않을 뿐 아니라, 조선의 선비를 알지 못하고 꺼려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재를 만나지 않을 수는 없다. 이렇게 충고하였다.
 
  성현의 도는 계책을 어떻게 하는가에 있지 중화의 안과 밖에 차이가 있을 수 없으니 사람을 기다리지 않고도 배울 수 있다. 그래도 사우(師友)의 연원(淵源)이 있으면 도움이 되지 어찌 만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감구유부후서」
 
  성현의 도는 우리의 하기 나름에 달려 있지만 그래도 사우는 필요하니 나라와 겨레를 떠나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김일손과 이목과 기맥이 통하였다. 성종 23년(1492) 12월 성균관 유생 시절 이목은 상소에서 영의정 윤필상을 귀신 같이 간사한 '간귀(奸鬼)'로 지목한 적이 있었다. 그러면서 '윤필상을 삶아 죽여야만 하늘이 비를 내리게 될 것이다'는 세간의 웅성거림을 숨김없이 적었다. 이때 거리에서 만난 윤필상이 태연하게 말하였다고 한다. "자네가 꼭 늙은 나의 고기를 먹어야 하겠는가."
 
  교육수국(敎育壽國)을 위하여
 
  김일손은 근세 유자의 병폐는 '훈고와 사장, 그리고 문장에 치우침'에 있다고 보았다. 진실을 추구하는 학자, 진정한 유자 즉 진유(眞儒)라면 『시경』『서경』『예기』『악기』『춘추』『역경』의 육학(六學)을 바탕으로 사람의 절제와 화합에 필요한 예악(禮樂)과 활 쏘고 말 타는 사어(射御) 그리고 글을 쓰며 셈을 하는 서수(書數)와 같은 여섯 가지 기예 즉 육예(六藝)를 연마하고, 전곡(錢穀)과 갑병(甲兵) 즉 재정과 군사 등에도 밝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아쉬웠다. "우리 동지들은 시무가 중요하다고 말만 할 뿐, 이런 재주와 역량을 갖추지 못하였다." 「유평사를 보내며(送柳評事序)」에 나온다.
  


▲ 경광서원(鏡光書院)
  경상북도 안동시 서호면 금계리. 이종준을 배향하는 유일한 서원이다. 이종준은 성품이 씩씩하고 쾌활하며 남효온, 권경유, 이정은 등과 절친하였다. 성종 16년(1485)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의령현령으로 재직하며 「경상도지도」를 만들었다. 그림에 뛰어나서 매와 죽을 잘 그렸다고 하고, 전칭(傳稱)작품으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송학도(松鶴圖)」가 있다. 일화가 전한다. 서장관으로 북경을 가는 도중에 역관(驛館)의 병풍 그림을 보고 붓으로 뭉개버렸는데, 귀국 길에 중국 관리가 새 병풍을 들여놓자 그림을 그려 놓고 왔다고 한다. 또한 시문도 일품이었는데, 남효온은 '맑고 차며 세상 티끌을 벗어났으니 화식(火食)하는 사람이 아니라 선인(仙人)이라야 이런 시를 지을 것이다' 하였다. 경광서원은 본래는 유정사(有定寺)라는 절터에 선조 원년(1568)에 들어선 서당이 1686년(숙종 12)에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고려 말 공민왕 시절 정국이 불안하자 안동으로 낙향한 배상지(裵尙志)와, 유성룡·김성일에게 배우고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여 평생 벼슬에 나가지 않고 후학을 양성하여 후기 영남학파를 일으킨 장흥효(張興孝)를 같이 모시고 있다.ⓒ김성규 

 

  김일손은 시무를 백성을 가르치고 살리자면 반드시 익혀야 할 사업이라고 생각하였다. 연산군 원년(1495년) 권경유(權景裕)가 홍문관 교리라고 하는 중앙의 근시청요직(近侍淸要職)을 사양하고 작은 고을 제천의 현감으로 나갔을 때였다. 서로 뜻이 통하고 무척 친하여 서로를 분신으로 여긴 사이였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데다 식구가 많아 녹봉으로 한양 살림을 꾸리기가 만만치 않은 터에 상처(喪妻)를 당하자 더욱 막막하여 지방관을 자청한 것이다. 어지러운 세상을 피하고 싶은 생각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김일손이 「교화설(敎化說)」을 지어 보냈다. 먼저 교화를 정의하였다. "학자의 사명은 백성을 위한다는 위민(爲民)에 있고 위민을 하려면 백성을 착하게 하는 선민(善民)에 있는데 이것이 바로 교화다." 교화는 사람을 사람의 길로 인도하는 사업이었다. 어떻게 백성을 교화할 것인가?
 
  교화를 생각하는 선비는 자신을 먼저 낮추어야지, 사람을 무시하거나 세상을 낮추어 보아서는 아니 된다. 열 집 사는 고을이라도 반드시 충신(忠信)하는 사람은 있을 것이므로 사람을 무시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요, 향음례(鄕飮禮)와 양로연(養老宴)의 시행도 세상을 낮추어 보지 않으려는 때문이다.
 
  '사람을 무시하거나 세상을 낮추어 보아서는 아니 된다'는 불비인(不卑人)과 불비세(不卑世)! 무슨 일을 한다고 하면서 일이 수월하지 않으면 의례히 '사람들이 본래 비루하여 그렇다' 혹은 '세상이 잘못되어 있다' 하며 백성 탓, 세상 탓으로 돌리는 세태에 대한 일침으로 읽어도 손색이 없다.
 
  그러나 훌륭한 관료라면 교화에 그칠 수는 없다. '수국(壽國)'을 이룰 수 있어야 한다. 나라의 무궁과 백성의 장수라는 두 가지 뜻을 담았다. 나라가 만세토록 건재하자면 백성이 제 명대로 오래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수국을 생각하는 관료라면 마땅히 '환과고독(鰥寡孤獨) 즉 의지할 데 없고 가난한 홀아비와 과부, 고아 등 홀로 사는 사람들을 젖먹이처럼 보살펴야 한다.' 김일손은 '가난을 구제하는 것이 교화보다 먼저다'라고 하였다

(가난을 구하고;;생활보호 대상자를 먼저 생각하고 ㅡ>교화하고( 자세;불비인,불비세) ㅡ>수국;나라를 무궁하게하고, 국민이 오래 살도록)
 
  나의 친구는 바보다
 
  권경유가 제천에서 객관 서편의 허물어진 집에 지붕을 새로 얹고 단장하여 서재로 꾸미고 김일손에게 기문을 청하였다. 요사이로 말하면 공공도서관을 세웠으니 기념사를 부탁한 것이다.
 
  김일손이 서재의 이름을 '치헌(癡軒)'이라 지었다. '바보의 집'이라는 뜻이다. 먼저 권경유의 어리석음을 적었다.
 
  그대는 외딴 고을의 현감을 자청하였으니 벼슬살이에서 바보짓이다. 그대는 조용히 앉아서 못된 토호와 간사한 향리를 무찌르며 홀아비와 과부를 어루만지는 데에만 마음을 두고 세금 걷는 데에 서투르니 정사에 어리석다.「치헌기」
 
  중앙의 요직에 있을 사람이 고을 현감을 자청하였으니 벼슬의 바보요, 토호 향리와 같은 지방 유지를 싫어하고 홀아비 과부 같은 힘없는 백성을 어루만지며 세금 걷는 데 서투르니 행정의 바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벼슬살이와 지방정치에 밝다는 말을 듣는가? '중앙의 요직을 바라며 민첩하게 사무를 처리하며 백성을 생각하기에 앞서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고 윗사람을 받들며 칭찬을 바라는 관리였다.' 조정의 실정과 관료의 모습에 대한 지독한 냉소였다. 권경유의 바보스러움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줄여 옮긴다.
 
  못난 관리는 관아가 허물어져도 그대로 방치하고서 백성을 수고롭게 하지 않았으니 정사를 간명히 하였다고 자랑한다. 그리고 분별이 있고 명석하다고 생각한 관리들은 멀쩡하게 좋은 관아까지 헐고 급히 말을 몰듯이 새 집을 지어놓고 "부지런하고 결단력이 있다"고 소리치면서 토목공사가 백성을 고단하게 하였음을 모른다. 그런데 그대는 허물어진 집을 고치고 지붕을 새로 얹었으니 분명 못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분별이 있다고도 못하겠다. 살고 있는 백성을 수고롭게 하는 대신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며 사는 유수(遊手)를 부리면서 그대 마음이 오히려 고단하였을 것이다. 그대의 노심(勞心)은 바로 그대가 일에 서툴기 때문이다.「치헌기」
 
  김일손은 어느덧 말하고 있었다. '우리의 벗이여, 그대는 홀로 마음을 힘들게 하며 백성을 아끼고 고을의 모습을 바꾸는 데 성심을 다하고 있을 뿐 세상의 간사한 기교를 정녕 모르는구나.' 그러나 이 집이 그대의 착한 정사의 산물이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업적으로 자랑하지 말라고 당부를 잊지 않았다. "하늘과 땅 사이의 만물은 모두 조물주가 주관하고 공물이 아닌 것이 없는데 만약 어떤 한 물건에 집착하면 그 순간 사사로움이 끼어들게 된다."
 
  오늘날 대규모 공사와 장대한 건축으로 '우리 고장을 새롭게 바꾸었다'고 하며 또한 '이것이 내가 한 일이다' 큰소리치는 군상에 대한 경종으로 들린다. 이렇듯 친구를 바보라고 부르며 서로 애틋한 웃음을 주고받았으니 아름다움이 차라리 눈을 시리게 한다는 말이 이런 정경에 어울린다.

 

역사의 상흔을 치유하지 않으면 중흥할 수 없다
 
  김일손은 어린 시절 조부와 부친에게 『소학』과 『통감강목(通鑑綱目)』, 그리고 사서(四書)를 익혔다. 그리고 밀양을 찾아 상중의 김종직에게 배웠다. 17세 때였다. 김종직은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나의 의발(衣鉢)을 전할 사람은 그대인데, 훗날 문병(文柄)을 차지할 것이다." 문병은 문형으로 국가의 학술과 문장의 표준을 세우는 직임이었던 성균관 지사까지 겸임하는 예문관과 홍문관의 대제학을 말한다.
 
  김일손은 19살에 문과에 도전하였는데 같이 응시한 두 형을 위하여 아프다는 핑계로 퇴장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때 두 형 김준손(金駿孫)과 기손(驥孫)은 나란히 합격하였다.
 
  김일손은 부친상을 마친 직후 성종 17년(1486)에 대과에 급제하였다. 23세였다. 그때 책문(策問)이 '중흥의 대책을 논하라'였다. 즉 '옛적부터 제왕이 천하를 얻고 대업을 이루었으나 자손이 지키지 못하여 쇠퇴하고 부진하다가 중흥하곤 하는데 연유와 사적을 설명하라.' 또한 물었다. '천하의 형세는 정해진 운수가 있어 인력을 용납하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치도(治道)를 다하지 못하기 때문인가.'
 
  먼저 '형세, 운수, 치도'의 관계를 정의하였다. "도(道)가 벼리[綱]이니 도를 얻으면 형세와 운수는 말할 필요가 없다." 즉 형세와 운수는 사람의 처사와 사람의 노력에 의한 치도의 실행 여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의 일치일란(一治一亂)과 일합일리(一合一離)도 치도의 문제이지 형세와 운수에 의탁할 수 없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풀어나갔다.
 
  치도의 주인은 임금이며 그 요체는 수기임인(修己任人)이다. 수기는 밝은 임금 즉 명군이 되기 위한 바탕이며, 이때 비로소 좋은 재상을 얻는 임인을 수행할 수 있다. 아무리 훌륭한 성군이라도 양상(良相)이 없으면 천하를 안정하여 나라를 세울 수 없다.

 

(수기임인...임금이 자신을 다스림을 연마해야, 인재가 따른다.)
 
  흔히 역사는 창업주에게서 용기와 지혜 그리고 강인함의 덕목만을 평가하는데 그렇지 않다. 물론 군웅이 각축하고 백성이 의지할 데가 없던 난세를 마감하고 새 나라를 세우자면 그러한 덕목이 절대 필요하다. 그러나 자세히 관찰하면 수기임인을 하지 않았다면 결코 민심을 얻고 천명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수기임인이 창업의 바탕이라는 것이다.
  

 


▲ 청계서원(淸溪書院)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 김일손은 1495년(연산군 1) 벼슬을 그만두고 정여창과 더불어 강론하며 살고자 함양 남계에 청계정사를 조성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모친이 세상을 떠나 뜻대로 하지 못하였는데, 탈상 후에 이곳으로 왔다. 여기에서 무오사화가 일어나서 연산군에게 잡혀갔다. 1907년 지방 유림이 청계정사 터에 서원을 조성하였다. 남계서원 바로 옆에 있다. 
  

  그러나 역사를 살피면 창업의 국가는 얼마 후부터 쇠퇴하고 민심이 흩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중흥'과 '멸망'의 기로를 경험한다는 것이다. 중흥을 정의하였다.
 
  무릇 중흥이란 이미 끊긴 천명을 다시 맞아 이어가고 이미 흩어진 민심을 다시 가두어 합치는 것이니 넘어진 나무의 그루터기에 싹이 트는 것과 같고 고인 물이 다시 흐르는 것과 같습니다. 「중흥책(中興策)」
 
  이때 임금은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하물며 용기와 지혜, 강인함의 측면에서 창업주를 따를 수 없는 상황에서 무엇이 더욱 절실히 요청되는가? 다름 아닌 수기임인이다. 이렇게 적었다.
 
  중흥의 도는 수기임인인데, 수기는 중흥의 실체[實]이며 임인은 그 활용[用]이니 수기를 하지 않고서는 임인을 할 수 없습니다.
 
  김일손은 금상의 치세를 중흥기로 보았다. 그러면서 단언하였다. '아아, 중쇠(中衰)가 없다면 어찌 중흥(中興)이 있겠습니까!' 왕조 창업 백 년 동안에 나라가 일시 쇠퇴하고 민심의 이반을 겪었다는 것이다. 세조와 예종의 치세에 대한 부정적 평가로 들린다. 그러나 중흥이 절로 올 수는 없었다. 임금은 자신을 닦고 착한 선비를 등용하여야 하지만, 먼저 반드시 해결하여야 할 일이 있었다.
 
  천지의 억울함을 풀고 일월의 어둠을 열면 기강과 법도가 찬란하게 수복될 것이며 예악문물이 다시 떨칠 것이니 이러한 다음에 중흥의 성대함이 열린다고 하겠습니다.
 
  천지의 억울함과 일월의 어둠은 무엇일까? 단종의 죽음과 현덕왕후의 폐출을 암시하는 대목으로 읽어도 좋을 듯하다. 중흥을 위한 일차적 과업으로 어두운 과거의 상흔을 치유할 것을 제기한 것이다. 당당하고 우렁찬 경륜이며 포부였다.
 
  비판과 대안
 
  김일손은 주로 예문관·홍문관·사간원·사헌부에서 봉직하였다. 또한 항상 춘추관의 기사관(記事官)·기주관(記注官) 등을 겸임하며 경연에 출입하였다. 언관과 사관을 맡으며 국가 학술과 문장에 관한 사업에 종사한 것이다. 정예관료의 길이었다.
 
  김일손의 언론은 준엄하고 냉정하였다. 훈구대신에게는 거침이 없었다. 특히 윤필상·이극돈·성준(成俊) 등이 권력을 남용하고 세력 부식에 열중한 사례를 폭로하며, 이들을 권세 있는 귀족, 즉 '권귀(權貴)'로 비판하였다. 사대부의 길을 벗어났다는 것이다.
 
  김일손의 언론은 비판에 머물지 않았다. 단적인 사례가 있다. 성종 22년(1491) 3월 지방관의 불법과 탐학을 줄이는 방안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대부분 신료가 사헌부와 의금부의 관료를 파견하여 감시하고 처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김일손은 달랐다.
 
  국가에는 예문관이 있어 춘추관을 겸하면서 시사(時事)를 기록하는 일을 맡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방은 야사(野史)가 없기 때문에 불법을 저질러도 악명이 후세까지 전해지지 않고, 품행이 탁월하고 기위(奇偉)한 사람의 이름도 아울러 묻혀 전해지지 않습니다. 지방에도 정치와 풍화(風化)에 관계되는 일을 기록할 수 있도록 기주관을 두어야 합니다. 『성종실록』 22년 3월 21일
 
  '지방에 기주관을 두자' 한 것이다. 기주관은 5품의 관료가 겸임하는 사관(史官)이었다. 엉뚱한 것 같다. 그러나 춘추관의 직제를 보면 발언 의도를 살필 수 있다.
 
  춘추관의 동지사(同知事)·지사(知事)·영사(領事)는 정2품 이상 판서와 정승이 겸임할 뿐 실무는 맡지 않았다. 기사의 수정과 편집은 정3품 수찬관(修撰官)과 종4품~종3품 편수관(編修官)이 맡았다. 그리고 기사의 작성과 검토는 5품 기주관과 그 이하 품계인 기사관의 몫이었다. 굳이 구분한다면 기주관은 기사를 검토하여 보완하는 위치라고 하겠다. 이렇게 하여 날마다 사건의 정리와 평론이 이루어졌다. 국사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보장하고 역사적 포폄(褒貶)을 위한 문치적 장치였다.

(사관의 의의...국사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보장하고, 역사적 포폄을 위한 장치)
 
  김일손이 말하는 '지방기주관'은 '춘추관의 분소(分所)'와 같았다. 지방에도 사건이나 인물을 기록하는 '야사(野史)'제도를 통하여 지방의 불법을 방지하고 훌륭한 인재를 발굴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방기주관 기구를 어떻게 구상하였는가, 즉 수령을 책임자로 하고 향교의 훈도나 교수를 기주관 정도로 생각하였는지, 아니면 별도로 중앙에서 파견하려고 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야사' 제도를 지방 정치와 문화의 핵심기구로 상정하였음은 분명하다. 자못 큰 그림이었다.
 
  다른 신료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런데 영의정 윤필상이 나섰다. "조정에 이미 사관이 있어 시정(時政)을 낱낱이 기록하고 있으니 다시 새로운 법을 마련할 필요가 없다." 결국 김일손의 제안은 없던 것이 되고 말았다.
 
  임금의 기대와 걱정
 
  성종은 김일손의 포부와 기개 그리고 경륜을 높이 샀다. 아마 세 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한 것도 좋았던 모양이다. 자신 치세에 이룩한 성대한 문치의 징표라고 생각하였는지 모른다.
 
  성종은 김일손 형제가 모친을 봉양하며 살 수 있도록 집현전 학사 출신으로 세조의 으뜸 공신이며 영의정을 지낸 최항이 살았던 집까지 내렸다. 흥인문 근처의 낙산 아래 영천동(靈泉洞)의 낙산원정(駱山園亭)으로 개울과 바위가 어우러져 자못 상큼한 정취를 돋우고 샘 위에 이화정(梨花亭)이라는 작은 초가까지 딸려 있었다. 그런데 한양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던지 모친이 자꾸 귀향을 고집하자 백형 김준손이 함양군수로 나가며 반납하였는데, 성종은 요동질정관에서 돌아온 김일손에게 내렸다.
 
  언젠가 성종이 동부승지 조위에게 김일손에 대한 소감을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조위가 승정원에 봉직한 기간이 성종 21년(1490) 가을부터 이듬해 여름까지였으니 아마 저간이었을 것인데, 『탁영선생연보』 연산군 원년(1495) 2월에 전한다.
 
  김일손은 문장이 뛰어나고 학문의 재능과 기량을 갖추었으며, 풍채는 장대하고 기절은 곧고 바르다. 또한 의론은 준엄하고 정연하여 대각(臺閣)을 통솔할 만하고, 지략은 넓고 깊어 낭묘(廊廟)의 직책을 맡길 만하다. 언론을 위하여 백부(柏府)의 요직을 맡겼고, 학문을 위하여 경연과 한원(翰苑)의 직위에 오르게 하였으며, 반드시 경사(經史)의 직책을 겸임하게 하였으니 장차 보상(輔相)으로 크게 쓰고자 함이다.
 
  대각은 사간원, 낭묘는 의정부, 백부는 사헌부, 한원은 예문관, 경사의 겸임은 홍문관과 춘추관을 말한다. 간쟁과 실무, 학문과 문장 그리고 언론의 기량을 고루 갖추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장차 보상 즉 임금을 보좌할 정승에 오를 것으로 기대한다는 것이다. 두 차례의 북경행도 사대외교의 경험을 쌓게 하려는 성종의 배려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걱정이 없지 않았다. 역시 조위에게 말하였다.
 
  김일손은 성품과 행적이 너무 준엄하고 고상할 뿐 아니라 젊어서인지 기상이 너무 날카롭고 언론이 심히 곧으니 그의 노성(老成)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성종은 김일손이 기상과 언론이 지나치게 비타협적인 것을 우려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지방으로 잠시 내려 보낼 생각을 하였던 것 같다. 아마 '그대 조위는 김일손과 절친하니 이 말을 조용히 전해야 할 것이다' 하였으리라. 실제로 김일손은 얼마 후인 성종 22년(1491) 10월 충청도 도사로 나갔다. 감사를 보좌하며 서무를 총괄하던 직임이었다.
 
  무거운 짐을 지고 달리다
 
  김일손의 언론은 임금도 예외가 아니었다. 거의 숨김이 없었다. 성종 20년(1489) 7월 예문관 검열로 있으면서 '임금이 술을 좋아하고 희첩을 가까이하며, 종친과 기락(妓樂)을 즐기는 폐단'을 아뢰었다. 폐비사건을 겪을 만큼 후궁이 많고, 또한 대왕대비와 왕대비, 대비는 물론 월산대군을 위로하는 연회를 자주 열었던 사실을 적시한 것이다. 그리고 국정의 요체로 '학문권장·욕망억제·학교진흥·풍속교정·궁금엄정(宮禁嚴正)·유일등용(遺逸登用)·간쟁가납(諫諍加納)·충간분변(忠奸分辨)'을 건의하였다.
 
  이에 그치지 않았다. 국가의 금기사항도 서슴없이 들춰냈다. 성종 21년(1490) 3월 『춘추좌씨전』을 강의하는 경연에 나갔을 때였다. 김일손은 '방번(芳蕃)과 방석이 후사가 없음을 안타깝게 여긴 세종이 자신의 넷째인 광평대군(廣平大君)과 다섯째인 금성대군(錦城大君)을 봉사손으로 삼고 사당까지 세웠다'는 전례를 거론하였다. 비록 태종에게 죄를 입었어도 인륜의 도리로서 제사는 잇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끊어진 세계(世系)를 이어주는 것이야말로 임금의 어진 정사'라고 하였다. 그리고 아뢰었다.
 
  당초 노산(魯山)은 유약하여 책무를 이기지 못하였을 뿐 종사에 죄를 지은 것이 아니었는데, 지금 고혼(孤魂)이 의탁할 곳 없이 떠도는지라 하늘에 계신 조종(祖宗)의 혼령이 어찌 근심이 없고 마음이 편하겠으며 상심하지 않겠습니까? 『탁영선생연보』성종 21년(1490) 3월
 
  노산군의 후사를 정하여 제사를 지내자는 건의였다. 노산군의 입후치제(立後致祭)! 이제껏 아무도 하지 않았던, 세조의 손자인 금상의 치세, 그 시절의 공신이 여전히 실권을 잡고 있는 상황에서 결코 쉽게 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더구나 '노산군은 종사의 죄인도 아니다'고 하였다. 성종은 놀라울 뿐이었다.
 
  성종 22년(1491) 10월 충청도사로 나갔는데 때마침 '흰 무지개가 달을 관통하는 이변'이 있었다. 성종이 구언교를 내리자, 이번에는 현덕왕후의 원상회복 즉 소릉의 복위를 주장하였다.
 
  김일손은 세종 즉위년(1418) 상왕으로 물러앉은 태종이 외척을 견제하려고 금상의 국구(國舅)인 심온(沈溫) 일가를 역적으로 몰살하였는데, 결코 세종의 중전인 소현왕후(昭顯王后) 심씨(沈氏)를 내쫓지 않았음을 거론하며 아뢰었다.
 
  아무 죄 없이 이미 세상을 떠난 현덕왕후를 노산군의 생모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서민으로 강등한 조치는 아무리 보아도 잘못이다. 「청복소릉소(請復昭陵疏)」
 
  김일손은 공자의 '삼 년 동안 아버지의 길을 고치지 않아야 효자라고 할 수 있다'는 가르침의 참뜻을 풀이하며 '선왕의 조치를 바꿀 수 없다'는 소릉복위 반대 논리를 논박하였다.
 
  아들 된 자로서 아버지가 잘못이 있어 고쳐야 할 바가 있다고 하여도 바로 고치지 않고 삼 년을 기다려 서서히 고치라는 것이지, 아버지의 길이 잘못이지만 종신토록 고치지 말라고 한 것은 아닙니다. 「청복소릉소」
 
  소릉폐치가 세조대의 일이고 지금은 예종을 지나 금상에 이르기까지 3대가 되고 또한 37년을 넘었으니 '이제는 고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남효온의 소릉복위 상소 이후 13년만이었다.
 
  얼마 후 성종은 한때의 국모였던 노산군 부인 송씨에게 적몰재산을 돌려주었고, 송씨는 정미수(鄭眉壽)를 양자로 삼아 제사를 맡겼다. 정미수는 문종의 부마인 정종(鄭悰)이 역모에 걸려 죽은 후에 관비가 된 경혜공주(敬惠公主)가 낳은 유복자로 노산군의 조카였다. 문종의 외손으로 유일하게 살아남은 혈육이었던 것이다. 세조의 정비 정희왕후(貞熹王后)가 거두었는데, 성종이 어린 시절 임금이 되기 전 궁궐 밖에 살 때에 곁에서 시중을 들었다는 사연이 있었다.
 
  외로운 행보
 
  김일손은 임금의 배려가 항상 부담스러웠다. 성종 23년(1492) 3월 인사문제를 다루는 이조전랑(吏曹銓郞)이 되었을 때는 '소년등과(少年登科)가 불행이다'라고 하면서 거듭 사직을 간청하였다. "지금 서른이 되지 않았는데 예문관·홍문관을 거치며 사관을 겸직하고 이조의 전랑까지 올랐으니 세상에서는 청선(淸選)이라고 하지만 전하의 은총이 두려울 따름입니다."
 
  성종 23년(1492)은 김일손에게 유독 힘들고 슬픈 한 해였다. 김종직이 세상을 떠나더니 여름에 중형 김기손이 불귀의 객이 되었고, 가을에는 남효온까지 저승으로 갔다. 이원·신영희(辛永禧)·정성근(鄭誠謹) 등을 만나 탄식하였다. "우리 도의 외로움이 더해가니 조야의 불행이다."
 
  임금이 배려하였을까? 고향에도 다녀오게 할 요량이었던지 임금의 유시를 각 고을에 전하는 경상도 방면 반유어사(頒諭御使)로 삼았다. 1493년(성종 24) 정월에 길을 떠났다. 용인의 객관에서 호남 방면으로 나가는 정광필(鄭光弼)과 하룻밤을 지냈다.
 
  정광필이 훈구대신과의 마찰을 걱정하며 언사의 과격함을 충고하였다. 대뜸 일갈하였다. "사훈(士勛) 그대마저 비굴한 논리를 펴는가." 사훈은 정광필이다.
 
  일대의 위인이 될 만한 자네가 나라에 도덕이 무너지면 침묵하며 용신(容身)에 만족하고, 나라에 도덕이 행해지면 재주와 명망으로 벼슬을 높이며 만족해한다면 될 말인가? 그대가 빠뜨릴 수 없음이 강직함일세.
 
  정광필의 성품과 행실, 언론과 학문을 인정하였지만 현실 안주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던 차에 그간의 아쉬움을 토해냈던 것이다. 김일손은 정광필이 재상의 재목이기는 하지만 임금을 제대로 보필하지는 못할 것 같은 느낌도 숨기지 않았다. "그대가 재상 자리에 올라 임금을 보필할 때 간사한 말에 속아 충성스럽고 어진 신하가 욕을 당하게 될 때에도 그대는 피눈물을 흘리며 죽음으로써 임금의 마음을 돌려놓아 간흉을 내치게 하지는 못할 걸세."
 
  사실 그랬다. 정광필은 연산군 말년 갑자사화에서 잠시 유배를 떠났으나 중종반정 이후 승승장구하여 중종 11년 (1516)에 영의정에 올랐다. 54세였다. 그리고 '신무문(神武門)의 변' 즉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처음에는 조광조 등을 구원하려고 하였지만 결국 남곤과 심정 등에게 굴복당하고 말았다.

 

예언의 노래
 
  성종 24년(1493) 가을 김일손은 독서당에 들어갔다. 강혼·신용개·이과 등과 함께 사가독서(賜假讀書)의 은전을 입은 것이다. 가을의 정취에 젖어 수심이 물밀듯 밀려왔고, 아스라한 쓰라림을 이기지 못하여 책을 덮고 붓을 잡았다.
 
  김일손 문학의 백미로 꼽히는 「추회부(秋懷賦)」의 도입부는 이렇게 시작한다. '밝은 낮은 짧아짐이 힘겨운 듯, 어두운 밤은 더욱 아득하여라. 들보의 제비는 둥지를 떠나 남으로 가니, 먼 북방에서 찾아온 기러기가 찬 서리를 맞으며 울어대는가. 땅 밑 뿌리를 찾아 떨어지는 나뭇잎에 눌렸을까, 귀뚜라미 소리가 더욱 서글퍼지네.' 그리고 강혼의 말을 빌러 자신의 비장한 심정을 읊어갔다.
 
  날마다 옛 글을 읽고 日耕墳典
  마음은 우주에 노닐면서도 心遊宇宙
  요순시대에 태어나지 못한 것을 한탄하는 것인가 恨未置身於虞唐者耶
  충량에 감개하고 感慨忠良
  흉악함과 간사함을 무척 미워하다 憤疾凶邪
  부질없이 지난 흥망에 이맛살을 찌푸리는가 謾顰蹙於前代之興亡者耶
 
  악이 선을 이기고 학문과 기상이 통하지 않는 세상에 분개하는 자취를 드러내며 어두운 시대가 오고 있음을 예감한 것이다.
 
  성종은 공신천하의 조정을 바꾸어보려고 신진사림의 언론과 학술을 지지지하였지만 어느 틈엔가 유자광과 임사홍 등을 재등장시키고 마침내 훈구공신의 전횡을 비판하는 신진사림을 '능상(凌上)'으로 기피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에 대한 실망이었으리라. 그리고 학문을 좋아하는 간쟁을 받아들인 금상의 치세가 끝나면 어찌 될 것인가? 무서운 공포의 쇠락의 광풍이 휘몰아치지는 않을까? 그러나 이것이 어찌 시절 탓인가? 나는 정말 떳떳한가? 김일손은 성현과 세상에 죄를 짓고 있는 자책감에 몸도 가눌 수 없었다.
 
  위로는 성현의 가르침을 저버리고 上負聖敎
  아래로는 세상의 바람을 가엾게 하다가 下孤時望
  나라의 곡식을 축내며 헛되이 날을 보냈으니 耗公廩而費日
  내 자신을 살피니 감당할 수가 없어서인가? 省吾私兮不敢當
  먼 길을 떠났으나 해는 이미 떨어졌으니 臨長途而景迫
  옛사람 따라 발버둥 치다 힘겨워 기우뚱거림인가 企古人兮力不遑
 
  지난 세월도 다가올 날들도 아득하였다. 그러나 강혼은 좀처럼 김일손의 슬픔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무슨 말이 필요할까? 그래서 '거문고 하나를 골라서 낭랑하게 어루만졌다'로 끝맺음을 하였다.
 
  강혼은 무오사화로 유배를 갔다가 얼마 후에 풀려나와서 연산군의 애첩을 추켜세우는 글을 지어 세간의 희롱을 뒤집어썼다. 그렇다면 김일손은 강혼의 앞날의 처신을 내다보았을까?
 
  훗날 이 글을 읽은 조광조가 이렇게 감탄하였다고 한다. "문장의 품격은 천고에 드물고 품은 뜻은 강개하고 격앙하며 기개는 웅장하며 분방할 뿐 아니라 평생의 마음자취가 잘 드러나 있다."
 
  음률의 세계
 
  김일손은 평소에도 '음률은 성정(性情)을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된다'는 생각으로 간혹 거문고를 다루었다. 그러다 독서당에서 본격적으로 입문하였다. 독서당은 오늘날 동호대교의 동호에 있었고 나중에는 서강대교 근처의 서호에도 있어서 호당(湖堂)이라고도 하는데 한강과 남산이 모두 잘 보이는 풍광이 좋아서 글 읽기도 좋지만 거문고를 켜는 데도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강개와 격정으로 인한 심신의 피곤을 잊고 싶었을 것이다. 독서당의 벗들과 같이 하였는데, 거문고의 달인으로 양화진에 살던 이총이 한강을 타고 올라와 음률을 잡아주곤 하였다.
 
  권오복이 간혹 찾아왔는데, 어느 날 육현금(六絃琴)의 유래와 함께 거문고와 학이 짝이 되어 어울린 사연을 들려주었다.
 
  고구려의 왕산악(王山岳)이 처음으로 여섯 줄 거문고를 연주하며 현학무(玄鶴舞)를 췄기 때문에 현학금(玄鶴琴)이라고 하였는데 나중에 학(鶴)자를 빼고 그냥 현금(玄琴)이라고 하였다. 「육현금 뒤에 적다」
 
  김일손은 반가웠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학은 먹을 것을 생각하지만 거문고는 먹지 않고, 학은 욕심이 있지만 거문고는 욕심이 없는데 서로 어울리는 것은 무엇인가? 그런데 그림 속의 학은 욕심이 없을 것이니 그려도 되지 않을까?"
 
  당대 화가 이종준에게 부탁하여 거문고에 학을 그려 넣었다. 거문고를 켜며 욕심을 잊고 그리고 시절의 절박한 안타까움조차 초월하겠다는 뜻을 주고받은 듯하다. '행위예술'의 장면이 눈에 잡히는 듯하다.
  

 

                                         ▲ 탁영금(濯纓琴)
  
  보물 제957호. 김일손의 18대 종손인 김성일 소유로 대구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길이 160cm, 너비 19cm, 높이 10cm로 중앙에 탁영금(濯纓琴)이라고 음각(陰刻)되어 있고, 하단부에 학이 그려져 있다. 김일손은 거문고의 유래에도 해박하였다. 즉 순임금 시절 오현금이었고 주나라 문왕 때 칠현금이 나와 이후로 유행하여 중국 진(晉)나라가 고구려에 전해준 거문고도 물론 칠현금이었다. 그런데 왕산악이 육현금으로 개작하여 신라에 전해지고 지금까지 유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언젠가 동화문밖 어느 집 대문이 패이고 헐어가지만 재목이 오동나무이고 재질 또한 좋아서, 주인에게 물으니 '약 백 년이 되어 이제 부엌으로 들어갈 때가 되었다'고 하니 얻어서 제작하였다. 그래서 '문비금(門扉琴)' 즉 '문짝거문고'라고 하였다. 집에는 오현금이 있었지만 육현금을 구하고 싶었던지라, "사물은 외롭지 않고 마땅히 짝이 있는 법인데, 백년이나 공허하여 반듯이 남을 것을 기약할 수 없었는데, 오호라 이 오동이 나를 만나지 않으면 사라져서 상대할 바가 없었을 것이니 누구를 위하여 나왔다 하겠는가!" 하며 무척 즐거워하였다. 그런데 여기에 당대 화가 이종준의 그림까지 새겨 넣었던 것이다. 김일손은 거문고를 시렁에 알뜰히 간직하였다. 다름이 아니었다. 「금가명(琴架銘)」에 적었다. "거문고는 내 마음을 단속하는 것이라 시렁을 만들어 높이는 것이니 소리가 좋기 때문만은 아니다."ⓒ문화재청
  

  어느 날 권오복이 '옛것을 좋아하면서 오현금이나 칠현금을 켜지 않고 육현금을 즐기는가?' 물었다. 다섯 줄 소리보다 경쾌하고 번화한 여섯 줄 소리는 문왕 시절에 처음 생겼으며, 시대의 변화에 따라 좋아하는 음률이 다르고 따라서 악기도 달라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김일손은 옛 도를 흠모하면서도 의복은 옛 것을 취하지 않았던 소옹(邵雍)을 빌렸다.
 
  지금 사람은 마땅히 지금의 옷을 입어야 한다. 「육현금의 뒤에 적다」
 
  '우주연표' 혹은 '우주시간의 사이클'을 작성하여 성리학의 우주철학을 정립한 대가의 권위를 빌려 시대와 장소에 따라 악기도 변한다는 사실을 말한 것이다.
 
  그런데 김일손은 집에서는 순임금 시절에 유행하였다는 다섯 줄 오현금(五絃琴)을 켰다. 육현금은 독서당 몫이었다. 밖에서는 지금을 따르지만 안에서는 옛것을 취하고 싶은 '외금내고(外今內古)'의 의도가 있었다.
 
  비록 옛것과 전부 합치할 수는 없지만 옛것에 심히 어긋나지 않고 싶지 않기 때문에 집에서라도 태고의 유음(遺音)을 즐기려고 한다. 「오현금의 뒤에 적다」
 
  음률에서도 소박한 옛 도를 따르겠다는 간절함이 스며 있다.
 
  물러설 수 없다
 
  김일손은 정녕 슬픈 세월이 오고 있음을 예감하였다. 세자가 공부를 싫어하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실제 시강원에서 대면하니 낙담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진시황의 유자 탄압과 같은 시대가 다시 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성종 25년(1494) 7월 시강원 동료들에게 걱정을 털어놓았다. "주상이 돌아가신 다음에 분서갱유(焚書坑儒)의 변이 있을 것이다." 성종이 붕어하자 김일손은 울부짖었다.
 
  하늘이여, 우리 동국이 요순의 치세를 다시 보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까? 오로지 복이 없는 창생을 버리시면 누구에게 복을 내리시려는 것입니까? 너무 하오이다.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나이까. 『탁영선생연보』연산군 원년 2월
 
  연산군 원년(1495) 3월 김일손은 '임금의 마음이 바른 정사의 근본이다' 하는 사직장을 내고 귀향하였다. 이때의 「한강을 건너며」가 있다.
 
  말 한 마리 느릿느릿 한강을 건너니 一馬遲遲渡漢江
  낙화는 물에 떠내려가니 버드나무가 비웃음을 머금은 듯 落花隨水柳含嚬
  미천한 신하 이제 가면 언제 다시 돌아오겠는가 微臣此去歸何日
  그래도 고개 돌려 남산 바라보니 봄은 이미 저물었더라 回首終南已暮春
 
  낙화와 같은 자신의 신세를 강가의 버드나무가 비웃고 있다는 것이다. 세태에 굴복하고 떠나감에 따른 자괴감이었다. 그러나 고향에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충청도 도사로 복귀하였다. 이때 유명한 「시폐(時弊) 26개조」를 올렸다. 연산군 원년(1495) 5월이었다. 도입부만 간추린다.
 
  신하가 전하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전하는 하늘을 두려워하소서. 그러나 멀다 하지 마소서. 천도(天道)를 한 번 멀다 여기시면 하늘을 업신여기는 마음이 생기고, 하늘을 업신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만물을 보면 마음의 방자함을 막을 수 없습니다. 『연산군일기』 원년 5월 28일
 
  여기에서 김일손은 임금의 마음공부와 솔선수범을 비롯하여 내수사의 혁파를 통한 왕실재정의 축소와 투명성 확보를 주장하였다. 각 관아를 책임지는 제주(提調)의 철폐도 제안하였다. 대신이 제주가 되어 각 아문의 운영과 실무관료를 장악하면서 오는 권력집중을 막자는 취지였다. 이외에도 사관제도의 확대, 어진 종친의 발탁, 숨은 인재의 발굴, 유향소의 활성화 등을 제안하였다. 훗날 사림의 정치 과제가 거의 망라되어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릉복위'를 제창하였다. 선대에서 역사의 상흔을 치유한 사례까지 들었다. "태종이 정몽주를 베었지만 세종은 충신으로 추숭하고, 태조가 왕씨를 죽였지만 문종은 숭의전(崇義殿)을 세워 끊어진 제사를 잇게 하였다." 연산군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부왕의 상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벼르고 있었을 것이다.
 
  폭군의 얼굴
 
  이해 늦가을 김일손은 다시 조정에 복귀하였다. 하루는 뜰에 서 있는데 삭풍이 거칠게 휩쓸고 지나갔다. 모든 풀이 엎드리는데 한 치도 못되는 촌초(寸草)가 굳세게 버티고 있었다. 문득 '질풍이 불어야 굳센 풀을 알 수 있구나' 하였다. 「질풍지경초부(疾風知勁草賦)」에 풀었다.
 
  장하다 한 치 풀아 哿矣寸草
  이 바람을 깔보는구나 今亦凌風
  사람과 사물이 人之與物
  이치는 다름이 없거늘 理無不同
  나라의 형편이 어지러운 시절에 何異夫板蕩之歲
  외로운 충절을 드높이는 것과 어찌 다를손가 拔千丈之孤忠
 
  그렇다면 어려운 시대를 외면하고 고개 숙이는 공후장상(公侯將相)의 모습은 질풍에 고개 숙이는 잘 자란 풀과 다름이 없지 않는가! 아아, 형세는 이미 기울었나, 이렇게 마쳤다.
 
  비록 숲에서 빼어나게 솟은 나무라도 雖然木秀於林
  바람에 반드시 꺾일 것인데 風必折之
  그러면 꺾인다고 무엇을 아파하겠는가 折之亦何傷兮
 
  온 힘을 다하여 절개를 지키겠다, 혹은 물러설 수 없다는 다짐이었다. 수사선도(守死善道)의 길을 결심한 것이다.
  김일손은 예전보다 더욱 강력하게 소신을 피력하였다. '경연을 폐지하지 말 것, 신하의 진언과 간쟁을 받아들일 것,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에 충실할 것'을 거듭 아뢰었다. 특히 '외척을 등용할 때에는 반드시 왕망(王莽)의 일을 경계로 삼을 것'에 힘을 주었다. 전한(前漢)의 외척이었던 왕망이 인사권을 틀어쥐고 권력을 독단하다가 결국 반국(反國)하여 '신(新)'을 세운 사실을 상기시킨 것이다. 왕실의 친인척을 마구 등용한 인사정책에 대한 비판이었다. 연산군의 반응은 싸늘했다. "총명을 조작하여 옛 법을 어지럽히지 말라."
 
  김일손은 사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표연말·최부·송흠(宋欽)·권민수(權敏手)·성중엄(成重淹) 등이 김일손의 사직을 받아들이지 말라고 재차 건의하였지만 연산군의 대꾸가 걸작이다.
 
  내가 즉위한 이래로 대간은 노상 궐정에 서서 논쟁만 벌이고 있으니 어리석은 백성들은 지금 사왕(嗣王)에 무슨 큰 과오가 있어 이 지경에 이르는 것인가 여길까 염려가 된다. 『연산군일기』 원년 11월 30일
 
  그리고 한술 더 떴다. "김일손 등이 나를 용렬한 임금이라고 여겨서 섬기려 하지 않는 것이고 이렇게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니 어찌 옳은 일인가!"
 
  김일손은 다시 한 번 소릉복위를 주장하고 조정을 나왔다. 성종 치세까지 포함하여 세 번째 문제제기였다. 연산군 2년(1496) 2월이었다.
 
  통한의 세월
 
  고향에서 내려온 김일손은 합천군수로 있던 권오복을 낙동강이 가파르게 돌아가는 길목에 있는 관수루(觀水樓)에서 만났다. 「권오복과 같이 관수루에 오르다」가 있다.
 
  느지막이 물가 모래밭에 나뭇잎 같은 배를 매니 晩泊沙汀葉葉舟
  말과 소가 어지럽게 오가는구나 紛紛去馬與來牛
  강산은 만고부터 항상 이와 같지만 江山萬古只如此
  인간과 사물은 잠시 살다 오래 쉬는 법 人物一生長自休
  서쪽 해는 이미 뉘엿뉘엿 물이랑에 아득한데 西日已沈波渺渺
  동으로 흐르는 물에 솟구치는 걱정을 흘려보내며 東流不盡思悠悠
  홀로 멈춘 배에 서서 석양의 따사로움 쐬다 보니 停舟獨立曛黃久
  흰 갈매기 두 마리 물을 차고 날아간다 掠水飛回雙白鷗
 
  혼란한 세상을 말과 소의 움직임으로, 허전함과 쓰라림에 감싸인 자신과 벗의 모습을 두 마리 갈매기에 대비시키고 있다. 권오복이 따랐다.
 
  이 몸은 천지 사이 하나의 빈 배더라 是身天地一虛舟
  칼날 같은 기운이 올해는 견우성과 직녀성에 비추네 劒氣當年射斗牛
  전에 나그네 생각은 무척이나 높았었지 覊思向來何落落
  벼슬 생각은 버리고 편안하게 지내야지 宦情從此便休休
  만고의 영웅이 이제 얼마 남았는가 英雄萬古幾人在
  은은한 달빛 머금은 빈 강에 흥을 낸 적이 언제던가 烟月空江引興悠
  물을 보고 산을 보면 이것이 즐거움이라 觀水觀山皆可樂
  오는 갈매기 나를 잊으니 나도 갈매기를 잊어야지 鷗來忘我我忘鷗
 
  벼슬을 버리고 차라리 친구까지 잊고 살아야 하는 세상이 오지만 산수를 벗 삼아 어둠에 꺾이는 모습일랑 보이지 말자, 하는 듯하다.
 
  김일손은 노환이 깊은 모친을 모시고 고향에서 살았다. 모친은 연산군 2년(1496) 윤3월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73세였다. 김일손은 시묘 중 참으로 조용하게 지냈다. 글이 없고 사연을 남기지 않는 시절이었다. 그래도 좀처럼 마음이 놓이지 않는 수심과 고뇌의 나날이었을 것이다. 언제일까? 권오복이 편지를 보내왔다. 무오사화가 일어난 직후 가택 수색 과정에서 밝혀졌다. 간추려 옮긴다.
 
  그대들이 급히 개현(改絃)하여 만사를 일신하려다가 온갖 비방을 샀으니 나는 울부짖으며 하염없이 눈물만 흘릴 따름이다. 비록 먼 곳에 있지만 위태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연산군일기』 4년 7월 12일
 
  개현은 악기의 현을 고친다는 말이니 요사이로 말하면 개혁이다. 급격한 개혁으로 임금과 훈구대신의 반감을 초래하여 화가 닥칠 것을 예견한 것이다. 그러나 권오복은 개혁이 필요 없다거나, 늦추어야 마땅하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화는 닥쳐오더라도 '그대와 뜻을 같이 하리라' 하였다.

 

죽음 앞에서
 
  탈상이 얼마 남지 않은 연산군 4년(1498) 정월이었다. 나라 사정이 금나라에 쫓겨 남쪽으로 내려간 북송의 어지러운 시절 같았다. 「유월궁부(遊月宮賦)」에 소회를 풀었다. 유월궁은 달나라로서 임금이 정사를 잊고 노닐던 방탕의 장소를 가리킨다.
 
  바둑으로 천하를 내기하듯 賭天下於碁局
  판을 이리 옮기고 저리 옮기다 돌을 떨어뜨리니 謾推枰而落子
  바로 승패가 결정되었네 俄勝敗之兩決
  이백 년 왕업이 二百年之基業
  한 판 노름에 망하고 輸孤注於一擲
  갈 곳 없이 남과 북으로 흩어졌네 各飄然而南北兮
 
  임금이 유희에 빠지면 나라가 망한다는 노래였다. 또한 연산군이 간언을 듣지 않고 훈구대신과 환관의 말에 의지하며 정사를 팽개치고 사치하고 방종함을 근심하였다. "권간이 나라를 좀먹고 충현(忠賢)을 배척하며 환관을 중히 높이고 토목공사를 일삼는다."
 
  연산군 4년(1498) 7월 김일손은 함양의 남계에 있었다. 모친상을 끝내고 정여창이 살던 근처에 지어놓은 집에서 요양하며 더불어 공부할 요량이었다. 여기에서 금부도사에게 체포되어 국청으로 끌려왔다.
 
  연산군은 『성종실록』 편찬을 위하여 실록청(實錄廳)에 수합된 김일손의 사초를 직접 읽고 국문하였다.
 
  연산군 : 네가 『성종실록』에 세조대의 일을 기록했다는데 바른 대로 말하라.
  김일손 : 신이 어찌 감히 숨기리까. '권귀인(權貴人)은 바로 덕종(德宗)의 후궁(後宮)이온데 세조께서 일찍이 부르셨는데도 분부를 받들지 아니했다'는 사실을 듣고 적었습니다. 『연산군일기』 4년 7월 12일
 
  또한 연산군은 '세조는 소훈 윤씨(昭訓 尹氏)에게 많은 전민과 가사를 내렸고 항상 어가가 따랐다'는 사초에도 신경을 곧추세웠다. 권귀인과 윤소훈은 성종의 생부로 덕종(德宗)으로 추존된 의경세자(懿敬世子)의 후실로서 세조의 며느리들이었다. 궁정의 숨기고 싶은 비밀이었다.
 
  연산군은 자신을 거듭 비판한 김일손을 '왕실을 능멸하였다'는 빌미로 죽이고 말겠다는 살기를 품었다. 출처를 집요하게 추궁하였다. 김일손도 완강하였다. "사초의 출처를 밝히면 실록은 폐지될 것이다." 그러나 무서운 불 담금질에는 어쩔 수 없었다. 허반(許磐)에게 들었음을 실토하였다. 세조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던 권귀인의 조카이며 양자이기도 하였다.
 
  허반도 바로 잡혀왔다. 언젠가 좌의정 홍응(洪應)에게 '세자는 훗날 다음 대를 이을 임금이 되면 만백성이 우러러 의지할 분인데, 지금 환관과 함께 거처하고 서연(書筵)에 나아가는 때가 적고 놀며 희롱하는 때가 많다'는 걱정을 털어놓았다가 연산군에게 들킨 적이 있었다. 이미 죽을 목숨이었던 것이다.
 
  국문은 계속되었다. 연산군이 '소릉의 관을 파서 바닷가에 버렸다'는 사초를 들이대며, '세조에게 반심(反心)을 품은 증거이다'라고 하였을 때에도 김일손은 당당하였다.
 
  성종 대에 출신한 신이 소릉에 무슨 정이 있으리까. 임금의 덕은 인정(仁政)보다 더한 것이 없으므로 소릉을 복구하기를 청한 것은 군상(君上)으로 하여금 어진 정사를 행하시게 하려는 것입니다. 『연산군일기』 4년 7월 12일
 
  소릉복위는 어진 정사의 첫 단추라는 것이다.
 
  이튿날에도 김일손은 사관의 책무를 말하며 바른 기록이야말로 임금과 국가에 대한 충성의 발로임을 강조하였다. "예로부터 사관은 순과 우와 같은 성군의 부친이라도 그 악행을 숨김없이 바른대로 적었으며, 공자 역시 『춘추』에서 당대 임금의 조그마한 잘못도 놓치지 않았습니다."
 
  진실 기록: 고난의 행군
 
  김일손의 다른 사초들이 속속 들춰졌다. 즉 '박팽년·하위지의 재주를 애석히 여긴 세조가 이들을 살리고자 신숙주를 보내어 효유(曉諭)하였으나 모두 듣지 않고 죽었다'거나, '탄선사(坦禪師)가 시구(屍柩)를 수습한 정분(鄭苯)은 김종서와는 죽음은 같아도 의리는 같지 않다고 하며 죽었다'는 내용 등이었다. 남효온의 『육신전』과 정여창의 「정분전」을 발췌하여 옮긴 것이었다.
 
  또한 성종 21년(1490) 3월 경연에서 노산군의 입후치제를 주장한 직후에 작성한 사초에 있는 '노산군의 시체를 숲 속에 던져버리고 한 달이 지나도 염습하는 자가 없어 까마귀와 솔개가 날아와서 쪼았는데 한 동자가 밤에 와서 시체를 짊어지고 달아났으니, 물에 던졌는지 불에 던졌는지 알 수가 없다'고 한 내용도 문제가 되었다. 남효온과 같이 방문한 원호에게 들었던 이야기였는데, 여기에 「조의제문」의 전문을 덧붙여 놓았었다. 『세조실록』에 실린 '노산군이 영월에 있을 때 금성대군과 송현수(宋玹壽)·정종(鄭悰) 등이 형벌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목을 매고 세상을 마치니 예로서 장사 지냈다'는 사론에 대한 정면부정이었다. 조정은 엄청난 충격파에 휩싸였다.
  그러나 처음에는 「조의제문」이 거론되지 않았다. 그런데 유자광이 「조의제문」에 덧붙인 '김종직이 과거하기 전에 꿈속에서 보고 느낀 바대로 충분(忠奮)에 부쳤다'는 평가를 근거로 세조의 정변과 찬탈의 풍자임을 조목조목 밝히면서 사태는 일변하였다. 7월 15일, 김일손이 잡혀온 지 3일 만이었다.
 
  권오복과 권경유도 즉각 잡혀왔다. 권오복은 '「조의제문」은 간곡하고 측은하고 침착하고 비통하여 남이 말 못하던 데를 말하였다'고 하였고, 권경유는 '「조의제문」은 충의가 격렬하여 보는 자가 모두 눈물을 흘렸는데 김종직에게 있어 문장은 다만 여사(餘事)일 뿐이다' 고 적었었다.
 
  권경유는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조의제문」을 실은 것은 항우가 의제를 시해한 악행은 만세가 지나도록 통분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초를 작성하는 추관이 '만세가 지나도록 통분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는 구절을 삭제하였다. '단종의 죽음에 대한 원통함도 만세까지 간다'로 읽었던 것이다. 공초를 본 권경유는 이 구절을 뺄 수 없다는 이유로 서명을 거부하였다. 항우의 의제 시해나 세조의 단종 죽임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실로 무서운 고문이 가해졌다. 그러나 '눈을 감고 견디며 아프다고 외치지 않았다.' 연산군이 전해 듣고 '권경유는 강포(强暴)한 자'라고 하였다고 한다. 『연산군일기』 4년 7월 22일에 나온다.
 
  다른 사관의 사초도 문제가 되었다. 홍한(洪瀚)은 '세조께서 화가(化家)를 꾀하고자 하는데 한명회 등이 무사(武士)와 결탁했다'고 하였고, 신종호(申從濩)는 '정창손이 노산군을 벨 것을 처음으로 주장하였는데, 노산군이 비록 세조에게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몸소 섬겼던 정창손이 어찌 베자고 제창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또한 표연말은 '소릉을 헐어버린 일들은 문종에게 저버림이 많았다' 하고, '소릉은 반드시 헐지 않아도 되는데 헐었다'고 적었다.
  이 사초들은 「조의제문」을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당대 최고 훈구공신인 한명회가 배후에서 무력 동원을 획책하였고, 정창손의 의리 없고 떳떳하지 못함을 들춰냈을 뿐만 아니라 세조 치세의 소릉 폐치가 분명 과도한 조치임을 거론한 것이다. 어두운 기억의 저편에서 건져낸 편린이며 망각의 탈출을 위한 진실 기록으로 역사투쟁의 한 장면들이었다.
 
  운명적 만남
 
  김일손은 마침내 무거운 짐을 벗었다. 붓도 함께 내려놓았다. 김일손의 문헌은 무오사화로 가택이 압수되면서 거의 없어졌지만, 백형 김준손의 아들인 김대유(金大有)가 겨우 일부의 시문과 일기를 수습하여 『탁영선생문집』을 꾸몄다. 중종 7년(1512)이었다. 그리고 한참 후인 명종 3년(1548)에 김일손의 일기를 바탕으로 『탁영선생연보』로 엮고서 친동생이며 김일손의 후사로 정해진 김대장(金大壯)에게 맡겼다. 김일손은 초혼의 단양 우씨와 재혼한 예안 김씨 사이에도 아들이 없었다. 이후 사손(祀孫)들이 흩어지면서 『연보』도 사라졌는데, 고종 11년(1874) 춘천의 한 집안의 서책 중에서 발견되어 빛을 보았다. 다음은 『연보』를 중심으로 성종 21년(1490) 27세의 궤적을 간추린 것이다.
 
  1월 연경의 오만관(烏蠻館)에 머물다
  2월 귀국
  3월 노산군(魯山君) 입후치제 주장. 사초에 「조의제문」실음
  4월 『육신전』첨삭 교정. 근친 귀향.
  「영산현감신담생사당기(靈山縣監申澹生祠堂記)」지음
  5월 「매월루기(梅月樓記)」지음
  김굉필과 가야산 유람하고 「조현당기(釣賢堂記)」 지음
  8월 홍문관 부수찬으로 경연 검토관·예문관 검열·춘추관 기사관을 겸함 9월 김시습·남효온과 중흥사 모임
  10월 예문관 대교(待敎)로 승진, 정여창을 후임 검열에 천거
  11월 진하사(進賀使) 서장관(書狀官)으로 북경으로 떠남
 
  김일손은 이해 봄 노산군의 입후치제를 주장하고, 남효온이 힘겹게 지은 『육신전』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등 국가의 문서를 참조하며 첨삭 교정하였으며, 여름에는 고향에서 신담을 위한 생사당의 기문과 「매월루기」등을 남겼으며 김굉필과 가야산을 돌았다. 그리고 가을에는 정여창을 예문관 검열로 추천하고 북경으로 다시 떠났다. 일 년 사이 두 차례나 북경을 찾은 것이다.
 
  무척 분주한 삶이었다. 그 사이에 남효온과 같이 처음으로 김시습을 만난 이른바 '중흥사 모임'도 가졌다. 세 사람은 사육신의 희생과 노산군의 분한에 관한 많은 사연을 주고받으며 지난 세월의 상흔을 더듬고 쓰린 가슴을 쓸어 담았다. 김일손은 실로 무거운 짐을 지고 달린 것이다.
 
  그러나 김일손이 어두운 과거와 대면하며 역사의 상흔을 기억하게 된 것은 김시습을 만나기 한참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5세 때에 선산의 이맹전(李孟專)을 찾았을 때였다.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평생 귀머거리 소경노릇을 하며 세상을 피하던 노(老)선비였다. 『주역』을 제대로 풀이하여 '동방의 주역선생'이라는 의미로 역동(易東)이라 불린 우탁(禹卓) 집안의 규수와 혼인하고 신행 가는 길이었을 것이다. 이맹전의 나이 87세,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이었다. 이맹전이 반가운 마음에 시를 지어 주었을까? 이렇게 되어 있다.
 
  집 옆 맑은 계곡에서 꿈도 많이 꾸었지 宅邊淸澗夢行多
  문득 우리 집에 등잔이 밝게 비추는 것을 알았네 俄覺燈明在我家
  음성과 용모 지척인데 보도 듣지도 못하니 애달프다 惆悵音容違咫尺
  다만 이 몸은 늙고 병들어 가는 나날이네 只因衰病日來加
 
  김일손이 「삼가 경은(耕隱)선생께 올리다」를 바쳤다. 경은(耕隱)은 이맹전의 호다.
 
  선생이 숨어 살며 청맹과니 하신 뜻을 先生韜晦久盲聾
  소자가 어찌 알아 뜻을 같이 하오리까 小子何知意欲同
  밤마다 접동새 우는 소리 끊이질 않는데 夜夜子規啼不盡
  달빛 받아 구의산 빛깔이 더 훤하네요 九疑山色月明中
 
  이맹전을 배알한 후 김일손의 뇌리에는 한때 만백성의 어버이였던 임금이 어디에 묻혔는지도 모르고 제사도 지내지 않는다면 말이 되는가? 현덕왕후는 쫓겨난 임금의 생모라는 이유로 넋마저 문종과 함께 잠들 수 없는가? 무엇 때문에 문종은 종묘에서 홀로 제사를 받아야 하는가? 이렇듯 왕가에 의리도 명분도 없으니 훈구공신이 오만과 방종, 사치와 부패를 일삼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화두가 떠나지 않았다. 운명적 만남이었다.
 
  순례자의 노래
 
  성균관에서 두 형과 공부를 하던 김일손은 남효온을 만나고 원주의 원호를 배알하였다.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집현전 부제학을 버리고 영월에서 흐르는 동강과 제천을 흐르는 서강이 만나 만들어낸 '한반도지형'이 아래로 보이는 산 중턱에 관란재(觀瀾齋)를 짓고 단종의 최후를 가까이서 지킨 은사였다. 평소 백이숙제가 되리라는 뜻을 「탄세사」에 읊었는데 다음과 같다.
 
  저 동쪽을 바라보니 솔잎이 푸르디푸른데 瞻彼東岡 松葉蒼蒼
  부수고 빻아서 주린 배를 채운다 采之擣之 療我飢膓
  아득하다 하늘 한 귀퉁이여 目渺渺兮天一方
  흙빛 같은 암울함이여 구름이 오색 빛을 가리누나 懷黯黯兮雲五光
  아 백이숙제가 아득하여 벗할 수가 없어라 嗟夷齊邈焉寡儔兮
  수양산에서 푸른 풀 뒤적이며 공연히 헛손질하네 空摘翠於首陽
  세상이 모두 의리를 잊고 녹봉을 쫓으니 世皆忘義循祿兮
  나만이라도 몸을 깨끗이 하고 노니는 척하여야지 我獨潔身而徜佯
 
  김일손은 북받쳤다. 「삼가 무항(霧巷)의 탄세사를 받들다」를 올렸다. 무항은 원호의 호다. 이때가 18세였다.
 
  한강물은 흘러 흘러가고 漢之水兮滖滖
  솟아오른 산은 푸르고 푸르러라 起之山兮蒼蒼
  어디선가 들려오는 두견새 울음소리 鵑哭兮一聲
  이 사람의 애간장을 끊어놓네 愁人兮斷腸
  서리가 대지를 덮으니 울창한 숲 빛깔이 변하고 霜滿地兮喬林變色
  구름이 하늘을 가리니 훤한 햇빛이 없어지네 雲遮天兮白日無光
  풍채가 장대한 사람이 若有人兮頎然
  양지 바른 산에 홀로 서 있구나 表獨立兮山之陽
  당신은 이제 떠나 목숨을 버려도 후회하지 않으리 此君一去沒身而不悔兮
  아아 나 또한 따르려고 하며 기웃거리네 我欲從之而徜佯 
  


▲ 관란정(觀瀾亭)과 원호유허비각
  
  충청북도 제천시 송학면 장곡리. 충청북도 기념물 제92호. 원호가 단종이 유배된 영월의 청령포를 향하여 조석으로 눈물을 흘리며 문안을 드리던 곳으로 손수 가꾼 채소와 과일을 빈 박통에 넣고 물에 띄워 청령포로 보내어 단종께서 드시게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세종 5년(1423)에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직제학에 이르렀던 원호는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고향인 원주에 내려와 은거하였으며, 단종이 죽자 영월로 가서 2년 상을 마쳤다. 임제의 『원생몽유록』에서 두건을 쓴 호남아로 형상화된 남효온을 하늘에 있는 단종과 사육신에게 인도한 선비로 나온다. 원호의 손자 원숙강(元叔康)은 벼슬에 나갔다가, 『세조실록』편찬 당시 사초에 사관의 이름을 빼고 실록청에 올려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다가 장살 당하였다. 이때 원호는 모든 집안의 서책과 문헌을 불태웠다고 한다. 집으로 『관란유고』가 전한다. 관란정 오른 쪽 비각의 유허비는 홍양호(洪良浩, 1724~1802)가 찬하여 세웠다.
  

  문과 합격 후인 성종 18년(1487) 가을에는 파평의 남곡으로 성담수를 배알하였다. 성삼문의 재종제였다. 비바람도 가리지 못할 오막살이 초가집에서 돗자리도 없이 흙바닥에서 밤을 지내고 날이 새면 낚시로 소일하고 있었다. 역시 남효온과 같이 갔는데 열흘을 함께 지냈다. 하루는 술병을 차고 강으로 나갔는데 성담수가 마음이 풀어졌던지 시를 지었다.
 
  낚싯대 잡고 종일토록 강변을 헤매다가 把竿終日趁江邊
  푸른 물에 발 담그고 곤한 잠을 청하니 垂足滄浪困一眠
  백구와 함께 나라 밖으로 날아가는 꿈꾸다가 夢與白鷗飛海外
  깨어나니 이 몸이 석양 아래 있더라 覺來身在夕陽天
 
  김일손이 「삼가 문두(文斗)선생께 올리다」를 바쳤다. 문두는 성담수의 호다.
 
  갈매기 해오라기 때 모르고 강 양편을 날고 도는데 鷗鷺忘機護兩邊
  모래를 깔고 바위를 베고 함께 한가로이 잠이 들었네 茵沙枕石共閒眠
  그대 꿈에 어디를 가서 놀고 왔는지 알 것 같지만 知君一夢遊何處
  지금은 맑은 바람 부는 북쪽 바다 하늘 아래 있을 뿐 只在淸風北海天
 
  성담수를 만난 다음에는 조려를 찾았다. 진주향교의 교수로 있을 때였다. 세조가 임금이 되자 과거를 포기하고 함안의 서산(西山) 아래에서 살았는데, 성담수·김시습 등과 함께 세조 4년(1458) 동학사에서 단종을 위한 초혼제에 참례한 적이 있었다. 낚시질 하던 어계(漁溪)로 호를 삼았는데 이때 69세였다. 무척 좋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다시는 소식이 없었다. 조려가 글을 보냈는데 다음은 그때 시 같다.
 
  한번 가더니만 하늘 끝인가 결국 오지 않고 一去天涯遂不來
  다시 소식이 없으니 무엇을 애달파하랴 更無消息竟何哀
  지금도 홀로 서서 두둑에서 고기 잡으며 如今獨立漁溪畔
  그대가 아니라 소개한 사람을 도리어 원망하노라 不怨伊人却怨媒
 
  조려는 다시 한 번 김일손이 보고 싶었는데 서운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국사에 얽매 있으니 그러겠지 하며 '소개자가 밉다' 하였다. 반전이 좋다. 그런데 누가 소개하였을까? 김일손이 황급히 「삼가 어계(漁溪)선생의 멀리 주신 글을 받들다」를 보냈다. 성종 19년(1488) 어느 날이었다.
 
  숨어 있는 붉은 꽃 누굴 향해 피었을까 幽花一朶向誰開
  봄 숲에 두견새 슬피 울어 창자를 끊는구나 斷腸春林蜀魄哀
  동풍에 휩쓸려 다 떨어진다고 해도 縱被東風零落盡
  단심을 지킬 뿐 벌 따위에 시집을 갈까 守紅不許嫁蜂媒
 
  김일손의 글을 받아본 조려는 이듬해 세상을 떴다.
 

이렇듯 김일손은 열다섯 살부터 이십 대 후반까지 세조의 치세를 은둔으로 저항한 노(老)선비를 차례로 탐방하였다. 그것은 차라리 순례였으며, 우리나라 기억운동, 당대사 바로쓰기 역사운동의 원형을 잉태한 풍경이었다. 따라서 김일손의 역사투쟁은 결코 섣부른 모험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아름다운 패자와의 진실을 향한, 미래를 전망하는 약속의 실천이었기에 추악한 승리에 매진하는 모습이 비일비재한 오늘날에 더욱 소중하게 새겨야 할 교훈이다.

 

 

 

 

출처 : 흰할매
글쓴이 : 흰할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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