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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죽음을 앞둔 사람과의 대화

김수로왕 2006. 10. 11. 08:03

                

 

아주 오래 전, 이십년 가까이 되어가는가 보다.

알고 지내던 선배 하나가 암으로 투병중인 아버지와 도대체 어떤 이야기를 해야하는 지,

시한부 생명을 선고 받아 당신의 죽음이 언제쯤 찾아올지 알고 있는 아버지와

무슨 이야기를 해야할 지 몰라 도서관에 가서

“죽음을 앞둔 사람과의 대화” 라는 책을 찾았다면서 씁쓸하게 웃었던 기억이 있다.

 

거억하건대 그 선배 그때 참 어려웠던 상황이었던 것 같다.

 대학 졸업 문제. 군대 문제. 그 상황에 맏아들인 그 선배에게

결코 적지 않은 충격이었을 아버지의 죽음.

새삼스럽게 왜 그때 기억이 다시 떠오르는지.

아마 그 선배가 혹시 무슨 답을 찾을 수 있을까 싶어 답답한 마음에 도서관을 뒤져 찾았다던

“죽음을 앞둔 사람과의 대화” 라는 책의 제목 때문인 것 같다.

얼마나 답답한 마음이었으면 그런 책을 다 읽어보고 싶었을까.


요즘 아이들 아빠가 한국에 가 있다.

아버님의 임종을 지켜보기 위해서이다.

그 심정이 지금 그때 그 선배의 심정과 같지 않을까.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버님은 그런 아들이 옆에 있는지도 모르시는 채로

누워 죽음을 기다리고 계실게다.

하루에 몇차례 씩 주사되는 몰핀과

이미 오래전에 정신을 놓으시고 치매로 고생해 오셨기 때문에...

 

병원에서 하루 종일 아버지 곁에서 떠나지 못하는 아들의 모습을 그려보면 가슴이 참 아프다.

85세. 전립선 암과 치매로 최악의 상태에 계신 아버님.

온몸에 암세포가 전이돼 이제는 더 이상 웬만한 진통제로는

통제가 되지 않는 통증 때문에 몰핀으로 연명하고 계신다고 했다.

워낙에 타고난 효자 소리 듣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엄청난 고통으로 괴로워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24시간 고스란히 지켜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까.

참기 힘든 고통 때문에 간혹 이를 악물곤 하셔서 틀니가 다 부서질 정도라고 했다.

그런 아버지을 하루종일 지켜봐야 하는 아들의 심정은 어떨까?

 

아들에겐 그 어떤 그늘보다도 큰 그늘이었을 아버지.

절대로 무너질 것 같지 않게 우뚝 커다란 모습이었던 아버지가

이제는 태어날 때의 그 모습,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기 위한 준비를 위해서인가

마를대로 말라 태아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간 것처럼 작게 꼬부라져서

고통과 싸우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보는 그 아들의 심정은 감히 헤아려 볼 수도 없다.

작을 대로 작아져 감당하기 벅찬 고통에 신음하는 아버지를 지켜보면서

아들은 아버지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을까... 


시아버님.

몇 년째 정신을 놓고 계셔서 아들 딸. 손자 손녀들의 이름도 가물가물.

어느 놈이 어느 놈인지 구별하지 못하신다.

딸을 보고 엄마라고 하고 며느리를 보고 딸이라 하고 손주 녀석들은

소 닭보듯이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고 계실 때가 많다.

 

결혼 생활 10년 만에 파경을 맞아 삼년을 아이들과 떨어져 살 때.

주말에 아이들을 데리러 갔다가 혼자 사는 며느리가 안쓰러워

따뜻한 밥 한끼 해먹여보내고 싶어하시는 시어머님에게 이끌려 들어가

간혹 편치 않게 밥이라도 한 끼 얻어 먹을 때면

아버님은 물끄러미 바라보시면서 요즘 왜 이렇게 얼굴 보기가 힘드냐고.

자주 놀러오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러면 늘 어색한 웃음으로 그러겠노라 얼버무리는 수밖에는 없었다.

 

아이들 떼어놓고 살면서 주말에만 데리고 와서 하루 끼고 자고 밥해 먹이고 웃어보면서

늘 마음에 칼을 품고 살아오던 때였다.

그런 중에도 그런 아버님을 뵙고 오는 날이면 마음이 무너지면서

나이든 어른한테 몹쓸짓한 것 같은 죄스러움과,

아버님 정신 놓고 계시지 않는다면 고집불통 아들과 못난 며느리 하는 짓

그대로 보고 두시지 않을 것이라,

그래서 혹시 아버님이 불호령이라도 치신다면

아이들과 떨어져 사는 생활을 마지 못해 접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당치도 않은 생각을 하면서 허탈하게 웃어보기도 했다.

 

삼년의 이혼 생활을 접고 다시 아이들과 함께 살기로 작정하고

아버님을 뵈러갔을 때 워낙에 건체이시던 아버님은 암과 싸우시느라

애처러울 정도로 작아지셨고 정신 놓고 계신지 이미 오래셔서

그저 잘 웃어주시는 것 밖에는 당신이 하실 수 있는 일이 없으셨다.

누군지 알아보시겠느냐 물었더니 아버님, 그 사람 좋으신 웃음으로 난처함을 대신하신다.

조카 며느리인지 뉘집 며느리인지 모르시겠다고...

그러면서 덧붙이시는 한마디. 네가 현경이 아니냐. 조현경이...내가 이름은 기억난다.

그리고는 스스로가 대견하신 듯 웃어 보이신다.

조카 며느리인지도 뉘집 며느리인지도 모르시면서

이름 석자 어찌 그리 선명히 기억하고 계셨을까.

아버님의 그 한마디 때문에 참 많이 울었다.

공연한 제 설움이었을 수도 있었던 그 울음은

어쩌면 세월이 만들어 놓은 아버님의 그 병약해지고 초라해진

너무 서러운 모습 때문에 더 복받쳐 올랐었던 것 같다.


결혼하고 신혼 때 아버님은 특별히 다른 표현은 하지 않으셨어도

난 충분히 귀염받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작은 아들의 새색시라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사랑스럽고 이뻤을까.

특별히 이쁜짓 하려고 노력하지 않았어도 아버님은 유별나지는 않았지만

가끔씩 그 넘치시는 사랑을 보여주시곤 했다.

 

가까운데 살면서 아들 내외 사는 것 보러오시는 게 큰 낙이었던 아버님은

말괄량이 며느리의 외출 길에 무겁지도 않은 가방을 자전거 뒤에 실어주시고 

자전거 끌고 앞서가시면서 만나는 동네 어른들께 며느리라 인사시키는 것을 즐거워하셨다.

별것 없는 음식솜씨지만 맛난 것 해드린다고 애쓰면

어떤 음식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달다 맛있다 칭찬하시고 어깨 우쭐하게 만들어주셨다.

뒤늦게 불었던 공부 바람에 가끔 귀갓길이 늦어질 때면

전철역에 마중나와 주시곤 하던 것도 역시 아버님이었다.

 

우리시대 여느 아버지들처럼 말로 못할 고생 많이 하신 아버님.

사느라고 바빠 정작 당신 자식들에게는 그 넘치던 사랑을 미처 나누어주실 틈도 없으셨을 게다.

그런 그분께 난 참 받은 게 많다. 하지만 드린 것은 하나도 없다.

지금도 멀리 떨어져 그저 너무 많이 힘들어하시지 않기만을 바랄뿐 가서 뵐 수도 없다.

차가운 병실. 작은 침대에 몸을 펴지도 못하고 누워계실 그 분을 생각하면 참 가슴이 아프다.

착한 며느리여서가 아니고 그저 약한 인간으로서.


아버님도 역시 누군가의 소중한 아기였던 시간이 있었겠지.

아버님 역시 배냇저고리 입고 옹알이 하던 아기였고,

아장 아장 걸음마 하면서 부모님의 얼굴에 가득 웃음 만들고 뿌듯하게 만들었던

귀한 자식이었을 게다.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고향 산천을 좁은 듯 누비고 다녔을 개구쟁이 사랑스러운 소년이었고,

혈기 왕성하고 늠름한 청년으로 자라나 어느 처녀의 가슴을 설레이게도 만들었을 것이다.

가장이라는 이름을 가지면서부터는 세상의 어느 아버지보다도

강한 아버지가 되고 싶어하셨을 것이고 어느 누구도 손가락질 할 수 없을 정도로

열심히, 성실히 당신의 인생을 살아오신 분이다.

하지만 세월 앞에는 어느 누구도 강할 수 없는 법.

85년의 세월의 흔적 모두 고스란히 안고

아버님은 이제 태어날 때와 같은 태아와 같은 모습으로 다시 작고 초라해지셨다.

병실 한 구석 작은 침대에서 이제 의식도 불분명한 채 죽음을 기다리고 계시는 그분.

시아버님.


그분의 가는 길이 그렇게 고통스럽지 않기를 기도한다.

그분이 내 말들어주신다면 그 분의 귀에 대고 작게 말씀드리고 싶다...

불경스럽지만 이제 그만 이승에서의 소풍을 마치시고 오신 그 곳으로 가시라,

웃으면서 훨훨 가시라...

그렇게 빌어드리고 손잡아 드리고 싶다.

당신의 이승 소풍은 때론 모진 비바람 때문에

자리 거두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때도 있었을 테지만

소풍 길에 남겨졌던 보물찾기에서 이미 충분히 값진 보물 몇 개 쯤은 찾으셨으니

힘들었다 억울하다 미련두지 마시고 훨훨 편하게 하늘로 날아가시라 빌고 싶다.

 

당신 소풍 길에 찾은 보물 하나가 당신 앞에 앉았으니

한번쯤 눈 떠 눈 마주쳐 웃어봐주시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편하게 가시라 빌고 싶다.

한때 철없어 아버님 속썩였던 아들과 이 못난 며느리도 이제 조금씩 철이 들어가는 중이니

이승의 모든 걱정은 다 놓으시고 이제 그만

태산같이 무거운 삶을 내려 놓으시고

깃털같이 가벼운 죽음을 맞으시라 기도하고 싶다.

당신 앞에 앉아있는 역시 또 약한 한 인간인 아들 손 한번 힘 있게 잡아주시고

이제 그만 가시길 진정으로 기도한다.

 

또 하늘에 계신 그 분께 빌어본다.

죽음 앞에, 고통 앞에 이렇게 약해진 한 인간...

그 분...이 곳에서의 삶은 충분히 당신께 칭찬 받을 만큼 선하게 사셨으니

이제 그만 편안히 당신 계신 곳에 불러달라고...

그렇게 간절하게 빌어본다.

 

많은 사람들의 기도만큼 큰 힘은 없다하니

이 글 읽는 모든 분들...이순간 아버님 위해 잠시 기도해주시길...


          










출처 : 사는 이야기
글쓴이 : 유 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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