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스크랩] 김덕승(金德承)

김수로왕 2011. 12. 11. 10:30

 

 

 

                                        김덕승(金德承)

 

 

1595년(선조 28)∼1658년(효종 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김해. 자는 가구(可久), 호는 소전(少) 또는 소첩(巢睫). 아버지는 의금부도사 진선(盡善)이다.

 


1617년(광해군 9) 진사가 되고, 1619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로 등용되었다. 중국어에 능하였으므로
예조좌랑 때 한어교수(漢語敎授)를 겸직하였다.
예조정랑·필선(弼善)을 거쳐 1625년(인조 3) 동지사서장관(冬至使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629년에는 해운판관(海運判官)이 되어 전주 등 다섯 고을에서 직납을 원하지 않는 이유를 들어 조운(漕運)의 폐를 상소하였다.

 


이듬해
지평(持平)이 되고 이어서 장령을 거쳐 1634년 헌납(獻納)이 되었다.
이때, 1617년 생원시의 장원 이영구(李榮久)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모론을 상소하면서 그와 함께 합격한 사람들의 이름을 도용하여 연명으로 하였으므로, 그의 이름도 들어 있어 문제가 되기도 하였으나 무고임이 밝혀져 무사하였다. 1635년에 다시
장령이 된 뒤 사예(司藝)·상례(相禮) 등을 지내고, 사복시정(司僕寺正)·목사(牧使)에 이르렀다. 경사 외에도 운서(韻書)를 깊이 연구하였고 그림에 능하였으며, 군서(群書)를 연구하여 성력제가(星曆諸家)에도 조예가 깊었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國朝人物考
東國文獻畵家編

경4파 상계 선영에 대하여 보첩기록을 살펴보면,

중조(中祖) 금녕군 휘목경(牧卿)의 묘소는 1966년 경북 상주시 화북면 견훤산성에서 찾았다고 하나, 수단하한 1761년의 정덕보 기록과 1802년 임술보 기록에는 묘소가 송악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음(墓在松岳).

2세 보(普)의 묘소는 영천 남면의 나질 언덕에 있다.(墓在永川南面羅叱峴)

3세 도문(到門)의 묘소는 장단 치북에서 10리 거리에 있는 사동의 선영에서 5리 근방에 있다.(墓在長湍舊治北十里距蛇洞先壟五里許夫人同窆云而)

4세 근(覲)의 묘소는 장단 치북 장북면 사동 속칭 금림릉 우강 제3위 묘좌 합분(墓長湍治北長北面蛇洞俗稱金林陵右岡第三位卯坐合墳舊碣毁逸 肅宗任辰改堅九代孫承旨洪福撰 十代孫書宇杭書;기미보)

5세 효분(孝芬)의 묘소는 장단 선영 우강 제1위 을좌 합분(墓長湍先瑩右岡第一位乙坐合墳)

6세 진손(震孫)의 묘소는 사동 선영 좌강 제1위 묘좌 쌍분(蛇洞先塋左岡第一位卯坐雙墳)

7世 영견(永堅)의 묘소는 장단 사동선영 좌강 제4위 진좌(長湍蛇洞先塋左岡第四位辰坐)---이후 세홍(世弘), 광수(光壽),희우(希禹),진선(盡善) 묘소 경기도 남양주 율석 선영(楊州治東尾谷面栗北里妙寂山)

영서(永瑞)의 묘소는 장단 사동선영 좌강 제5위 사좌 합분(長湍蛇洞先塋左岡第五位巳坐合墳表石)--- 이후 자손 묘소 미상.

영정(永貞)의 묘소 장단 사동선영 우강 제4위 묘좌 쌍분(長湍蛇洞先塋右岡第四位卯坐雙墳神道碑晋州姜渾撰竝書) ---세균(世勻) 및 첨수(添壽), 익수(益壽), 종수(從壽)의 묘소는 원주시 귀래면 신현 선영(原州治南貴來面彌勒山薪峴) 2자 증수(增壽)는 충주 치남 불정면 화산동(墓忠州治南佛頂面花山洞加叱頓山) 말수(末壽)의 묘소는 원주 간천면 적구미(墓原州干川面赤九未寅坐),
세권(世權) 및 이수(이壽)의 묘소는 원주 간천면 적구미(墓原州干川面赤九未), 기수(期壽)는 괴산 서면 지동(墓槐山西面池洞甲坐合墳), 세준(世準) 묘소는 미상임.

영순(永純)의 묘소는 장단 사동선영 우강제2위 을좌 합분(墓長湍蛇洞先塋右岡第二位乙坐合墳有表漫滅無字)-世應및 明壽의 묘소는 화순군 이양면 쌍봉리 산 80번지-제2자 종수(宗壽) 묘;果川

위 기록 및 기타 기록에 비추어 보아 금녕군파 3세 휘도문(諱到門)의 묘소를 시작으로 참판공 휘영견 4형제분의 묘소와 참판공 휘영견 후손들 선영(先塋)만이 경기도 장단의 사동에 있고, 안경공 자 휘세균 및 자손, 휘세권 및 자손들 묘소는 강원도 원주 및 충청도 괴산 등지에 있고, 횡성현감공 휘영서, 석성현감공 휘영순의 자손들 묘소에 대한 기록은 잘 보이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휘도문(諱到門) 면주의 “本朝官奉常大夫三司副使”라는 기록에 비추어 보아 장단의 사동 선영은 조선조(朝鮮朝)에 조성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 안경공파(安敬公派)의 용안사(龍安祠) 건립 연혁에 의하면, 전략 … 장단(長湍) 장북면(長北面) 매현리(梅峴里)에 묘가 계신, 부사공(府使公), 총랑공(摠郞公), 서흥공(瑞興公), 교리공휘진손(校理公諱震孫) 이하 경사파(京四派)의 4형제인 참판공(參判公), 횡성공(橫城公), 안경공(安敬公), 석성공(石城公), 제선영(第先塋)의 묘소(墓所)역시 3.8선 이북지역에 계신지라 … 후략 … 등의 기록과

소전공(諱德承) 구보유기(舊譜遺記)에 이조 참판공(永堅)의 4형제의 저택(第宅)들이 경성(현 서울) 남부 쌍리문동이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자손들은 서울에 거주하였고, 경기도 장단군 사동에는 집성촌이 존재하였던 것이 아니라 선영(先塋)만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6.25전쟁의 포화에 선영이 훼손되었는지 여부에 대한 자료는 발견되지 않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소전공 구보 유기(少전公舊譜遺記)
김덕승(金德承1595∼1658. 중조의 12世. 갑봉 김우항의 조부)

按三國史曰新羅之祖少昊金天氏之後故姓金焉新羅古誌謂金閼智乃金官國首露之後首露乃少昊金天氏之後故姓金焉金庾信碑文曰軒轅之裔少昊之胤其始祖首露與新羅同姓云
생각건대 삼국사(三國史)<기>[1]에 이르기를, 신라의 조상은 소호김천씨(少昊金天氏)의 뒤임으로 성(姓)을 金으로 하였다 하고, 신라고지(新羅古志)에 김알지(金閼智)는 금관국(金官國) 수로의 후요 수로는 소호김천씨의 뒤인고로 성을 金이라 하였다 하고, 김유신 비문(金庾信碑文)에 이르기를 헌원(軒轅)의 후손(裔)이요 少昊의 아들이니 그 시조 수로는 신라와 동성(同姓)이라 하였다.
[1]三國史記 ; 김부식(金富軾) 등이 고려 인종의 명을 받아 1145년(인종 23)경에 편찬한 삼국시대의 정사.

庾信首露之十二世孫源派未遠必有傳述
유신은 수로왕의 12世孫(12代孫)이라. 근원(源派)이 멀지 않아 반드시 전술(傳述)이 있을 것이다.

又按三國志辰韓在馬韓之東其耆老傳世自言秦之亡人避秦役來適韓國馬韓割其東界地與之言語風俗不與馬韓同有似秦人今有名之爲秦韓者云辰韓卽今嶺南之域以此言之來自中國不可謂無此理也
또 삼국지[1]를 살피건대 진한은 마한 동쪽이라, 그 기로[2]들이 후세에 전하기를, 자신들은 진(秦)나라를 도망친 사람들로서 진나라의 부역[3]을 피하여 한국으로 오자, 마한이 동쪽 한 구역을 나누어 주었다하고 언어와 풍속이 마한(馬韓)과 같지 않고 진인(秦人)과 비슷하므로 진한이라 이르기도 하였다고 한다. 진한은 지금 영남 지방인데 이로써 말하면 중국으로부터 왔다는 것이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다.
[1]三國志; 진(晉) 나라의 진수가 290년경에 사찬한 魏 蜀 吳 삼국시대 66년간(220 265)의 정사.
[2]耆老; 연로하고 덕이 높은 사람. 60세 이상, 耆=60세, 老=70세
[3]부역 ; 강제노동

許參奉昉陽陵君許 (禾+ )之父也自少專精譜牒在 萬曆乙酉撰出許譜許亦駕洛之後也其時未經兵火載籍俱存許公博考窮搜作爲其譜譜序曰古稱駕洛與新羅同出於少昊金天氏其紫繩金 (盒)之說是訛言也三國之時俗尙荒誕妖言間雜不可盡信云云許公必有所見而爲此說也
허참봉 방(許參奉昉)은 양릉군(陽陵君) 허적의 아버지이다. 어릴적부터 보학에 전심 노력하여 만력 을유년(萬曆乙酉年=1575년)에 허씨의 보첩을 편찬하였다. 허씨도 역시 가락국왕의 후손으로 그 때는 병화(兵火)전이라 문적(文籍)이 구비했을 것이요, 허공(許公)이 널리 수탐하여 편찬하고 보(譜)의 서문에 쓰면서, 옛적에 칭하기를 가락은 신라와 더불어 같이 소호김천씨에게서 나왔다고 하였으니, 자승금합[1]에서 나왔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삼국시대에 풍속이, 황당무계하고 요사스러운 것을 숭상하여 그런 잡스러운 말을 하였을 것이니 다 믿을 수 없다 한 것은 반드시 소견(所見)이 있어 하신 말씀이다.
[1]紫繩金 (盒) ; 하늘로부터 자줏빛 줄에 드리워진 붉은색 보자기에 쌓인 황금상자

又按金僉知止男 光州金氏族譜後 曰建武之壬寅首露立永平之乙丑閼智生其立其生相去只二十四年金首露金閼智盖一時之人也 謂以閼智爲首露之后者未知何據而金庾信首露之十二世孫而其碑文以爲新羅之金駕洛之金同姓云則必有所據
또 생각건대 김첨지 지남(金僉知止男)이 광주김씨(光州金氏)의 족보 발문(跋; 후기)을 쓰면서 건무 임인(建武壬寅)년에 수로가 건국하고, 영평을축(永平 乙丑)년에 알지가 났으니 相距(나이 차이)가 단 24년이라 김수로 김알지는 한 때 사람일 것이다 하였으니, 알지를 수로왕의 후<손>이라 함은 어디서 근거하였는지 알 수 없으나, 김유신은 수로왕의 12세손(世孫)이자, 그 비문에 되어 있기를 신라의 김씨와 가락의 김씨가 동성(同姓)이라 하였은즉 근거가 있을 것이다.

又按三國遺事駕洛國記之撰在遼道宗太康二年 高麗文宗三十一年丙辰溯建武十八年壬寅駕洛開國之始 凡一千二十五年季己經千年(已經千秋)未知何據而爲此說耶 東方史籍只憑三國史而三國史之撰久於遺事之前矣 自中國名遺事諸書皆涉不能此尤可徵
또 삼국유사를 살펴보면 가락국기의 찬술이(찬술한 때가) 요(遼)의 도종태강(道宗太康) 2년이요 고려 문종 31년 병진(丙辰)이라하니, 건무(建武) 18년 임인(壬寅)에 가락이 개국하여 무려 1,025년으로 적어도 천년이 지냈는데 무슨 증거로 이런 말을 하였는가. 동방사적(東方史籍)은 단지 삼국사를 믿을 뿐이라. 삼국사의 찬술이 삼국유사보다 앞서고, 중국의 명칭을 따르는 유사(遺事)등의 모든 서적을 전부 살펴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함을 가히 알겠다.

又按輿地勝覽曰三國遺事未知誰作亦出於高麗中葉以後其所記載皆荒誕不經不足取信
또 생각건대 <동국>여지승람에 적혀 있기를 삼국유사는 누가 썼는지도 모르고, 고려 중엽 이후에 나왔다고는 하나, 그 기재된 것 모두가 황탄하고 경위가 없어 받아들여 믿기에는 부족하다.

又按三國史駕洛仇衡以梁中大通四年壬子降于新羅仇衡是梁武帝時人也 金寧君以高麗忠惠時立朝是元朝之末>其問 後總八百二十餘年舊譜草本以金寧君直係於仇衡則{桀-木}謬明甚矣 金寧君派分未知始於何葉莫得而詳也
또 삼국사<기>를 살펴보면 가락의 구형<왕>이 양나라 중대통4년 임자(532년)에 신라에 항복하였다 하니 구형은 양무제 때 사람이다. 금녕군은 고려 충혜<왕>때 입조하니 이는 원나라 말기이고 그 사이는 <구형왕후 금녕군까지> 총 8백20여년이 되었다. 구보의 초본에는 금녕군이 구형의 직계로 되어 있으나 이는 심히 명백한 오류이다. 금녕군파는 나누어져 시작도 알지 못하는데, 잎(자손)이 누구인가를 어찌 상세히 알 수 있을 것인가.

又按涵虛亭洪公貴達撰 先祖校理公碑文只 我先世高祖忠簡公而己不及於五世以上先系莫詳忠簡公旣奕世冠冕官至台鼎先世系派 宜有所徵而爲子孫者務於質而不欲爲文勝之史乎可爲慨然碑版不載譜牒不明心常痛鬱若聞該博君子不憚窮尋余於
또 생각하면 함허정(涵虛亭) 홍귀달이 선조 교리공(先祖校理公=진선) 비문을 찬술하면서, 다만 우리의 선조세대로서 고조 충간공(高祖忠簡公=보)까지 기록하고, 5세이상(五世以上)은 선계가 상세치 않아 기록하지 안하였다. 충간공(忠簡公)이 세상에 들어나셨고 벼슬이 정승에 이르렀으므로, 선조의 계파에 당연히 증거가 있을 것인데, 그 당시 자손으로서 실질적인 것에만 신경쓰고, 뛰어난 문사에 대한 역사기록에 욕심이 없었던지, 억울하고 원통하게도 비에도 기재가 없고 보첩에도 명확하지 못해, 마음이 항상 아파 해박군자(該博君子)를 만나면 어디까지라도 찾아보려고 하였더니

崇禎戊辰春適聞許僉正涵氏明於譜牒往問之乃曰忠簡公之上有一世吾有舊譜可徵出示之卽 陽川許氏世系中書也其書不但在壬丁兵 之前詳該較古無比 令人欽服余因手自謄寫今以金寧君爲祖此非偶然凡我宗族子孫各宜體悉
숭정 무진년(崇禎戊辰年=1628년) 봄에 마침 허첨정(僉正; 조선조 종 4품 벼슬) 함씨(涵氏)가 보학에 밝다는 발을 듣고, 가서 물으니 충간공(忠簡公)위에 1世가 있으니 우리(허씨)가 가진 구보에서 증거할 수 있다하고 보이는데, 즉 양천허씨(陽川許氏)의 세계서(世系書)이었다(양천허씨 세보중의 한 책이었다). 그 책은 임진왜란(1592)과 정묘재란(1597)의 병화전(壬辰兵火前)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매우 상세하고 옛날 것 중에 이것에 따를 것이 없었다. 내가 흠복[1]하고 등사하여 금녕군부터 파조(派祖)를 삼으니 우연이 아니다. 모든 우리 종족(宗族)의 자손은 마땅히 모두 이에 따라야 할 것이다.
[1]欽服; 깊이 공경하고 우러러 사모하여 복종함
以上 1754년 甲戌譜 記錄

以下 1799년 己未譜 追記

先祖三司副使公墓在長湍舊治北十里距今先 蛇洞五里 許而祖考進士府君在世時碣表爲人所取終不得尋愴咽
선조 삼사부사공(도문(到門), 보의 子)의 묘는 장단의 옛 치북에서 10리의 떨어진 거리에 있는 지금의 선영인 사동5리에 있다. 허씨(許涵)의 조부인 진사부군이 살아 계실 때, <삼사부사공의> 묘갈표를 어떤 사람에게 얻었다고 하였으나, 끝내 찾지 못하여 아쉽다.

我 朝開國時先祖受宅묵(厂+墨)於京城南部雙里門洞先祖吏參公四昆季第宅皆連牆接屋至今後孫瞭然祥知吏參公之宅卽我宗家從祖奉事公室違法擅賣於李大燁安敬公之宅其孫賣於李益燁石城公之宅爲李元燁家矣
조선이 개국할 때, 선조가 경성(현 서울) 남부 쌍리문동에 있는 집을 받아서 사용하다가, 선조 이조참판공(영견)의 4형제의 저택(第宅)들이 전부 담장이 연결되어 가옥이 접했다는 것을, 현재까지 후손들이 분명하고 명백하게 상세히 알고 이조참판공의 집은 나의 종가(큰집)인데, 종조(조부의 형제)인 봉사공(希舜)의 부인(종조모)이 도리에 어긋나게 마음대로 <이 집을> 이대엽에게 팔아 버렸고, 안경공(영정)의 집은 그 손자가 이익엽에게 팔아 버렸고, 석성공(영순)의 집은 이원엽의 집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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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국                                            (5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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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경       목경(경파)              익경(감무공-사군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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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저         수          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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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문   달문    현문    창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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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원    효분-병조참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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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손-교리                                                                                   진서 -병조참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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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견-이조판서    영서      영정-병조참판     영순                      영모 영희 영석

│                      │         │                      │                              │       영견-이조판서

참                      횡         안                      석                              호       영서-횡성현감

판                      성         경                      성                              참       영정-안경공

공                      공         공                      공                              공        영순-석성현감

파                      파         파                      파                               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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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홍                 세경    세균 세권    세응 세보 세발 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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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수             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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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순              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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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선 (의금부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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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승 (사간원)

                    │

                  홍경 (부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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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량           김우항 -우의정 (配 광산김씨 (장인-김세정)

 

 

 

출처 : 김해김씨 삼현파(판도판서공 휘 관파)
글쓴이 : 강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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