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스크랩] 김상옥-독립운동가

김수로왕 2011. 12. 11. 10:27

 

 

    日 경찰 1000여명 상대 '1인전쟁' 치른 김상옥

                                            당시 총격전 재구성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의 실패로 항일 운동은 침체를 겪고 있는 반면 일제는 한반도의 완전 식민지화 성공을 자신하고 있던 1923년 1월 12일 밤.

독립운동을 중점 수사하고 탄압하는 전담 경찰서였던 종로경찰서 서쪽 창문을 통해 폭탄이 날아들어왔다.

엄청난 폭음을 내며 부근 일대를 지진처럼 뒤흔든 폭탄이 겨냥한 곳은 경무계 방이었다.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유리 파편이 튀고, 벽이 무너지는 등 종로경찰서 일대는 아수라장이 됐다.

 

일제의 서슬이 퍼런 서울 한복판에서 폭탄을 던져 그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고 잠들어 있는 민족혼을 일깨운 거사의 주인공은 의열단의 김상옥(당시 34세)이었다. 조선총독을 암살하고 조선총독부를 폭파하기 위해 1922년 12월 중국 상하이에서 국내로 잠입한 김상옥은 폭탄의 성능 실험과 독립투사 탄압의 상징이었던 종로경찰서 응징이라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노렸고, 결과적으로 소기의 성과를 얻었다.

의열단 단원들이 폭탄과 무기를 지니고 국내에 진입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일본 경찰은 수사 본부를 종로경찰서에 설치했지만, 보기 좋게 ‘한 방’을 먹은 격이었다.

 

김상옥의 대담함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폭탄 투척 후 동료를 만나 김상옥은 “이게 무슨 소리냐”며 딴청을 피운 뒤 “구경이나 하고 가자”해서 자신의 ‘작품’을 여유롭게 감상까지 했다.

김상옥의 동료들도 이후에 김상옥을 만난 후에야 종로경찰서 폭파사건의 주인공이 김상옥인 것을 알았을 정도로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일제 경찰은 행인 6명이 다쳤다고 발표했을 뿐 경찰측 피해상황은 철저히 은폐했다.

 

이후 김상옥은 삼판통(현 용산구 후암동)의 매형집에 은신하며 총독 암살 계획을 준비해나갔다.

하지만 종로경찰서 의거 5일 뒤인 17일 새벽 김상옥의 은신처를 알아낸 종로경찰서 형사 15명이 겹겹이 포위했다. 김상옥의 방 문고리를 다무라 형사가 잡고 힘껏 당기자 김상옥은 목침으로 문고리의 빗장을 힘껏 쳤다.

 

빗목이 부러지며 문이 활짝 열리자 다무라는 엉덩방아를 찍었다. 이후 방으로 들어선 다무라가 이불을 당기는 순간, 김상옥은 비호처럼 방바닥을 박차고 일어나 다무라의 가슴 한복판을 가격했다. 다무라와 방문 앞에 있던 경찰 2명이 총격으로 연거푸 쓰러지자 나머지 경찰들은 혼비백산하여 장독 뒤나 마루 밑으로 숨어버렸다.

 

전광석화 같은 기습으로 경찰의 넋을 빼놓은 김상옥은 유유히 남산 쪽으로 빠져났다.

경찰의 추격을 뿌리치는 길은 고통 자체였다. 무릎까지 빠지는 눈 쌓인 길을 헤치고 방향을 잡아가던 김상옥은 서빙고 채석장 낭떠러지에 떨어지고 말았다.

다행히 평지에 내려 앉은 김상옥은 자신이 버선발 차림이란 걸 그제야 깨달았다. 발바닥이 다 헤져 발을 떼기 고통스러웠지만 그는 채석장 비탈길을 걸어 장충단을 거쳐 왕십리에 있는 안장사에 도착했다.

 

일본 경찰 1000여명이 남산을 샅샅이 추적했지만 발견한 것은 김상옥이 눈 위에 남긴 발자국뿐이었다. 놀라운 것은 발자국 사이 간격이 5m, 10m에 달했다. 언론 보도를 접한 사람들은 “김상옥이 축지법을 썼다”고 수군거렸다. 절 부엌으로 들어간 김상옥은 동자승에게 부탁해 끓고 있는 생쌀밥을 바가지 채로 찬 물에 담가 허기를 달랬다.

 

이후 주지 스님을 만나 “도박을 하다가 일경에 쫓기고 있다”고 말한 뒤 승복과 송낙(소나무로 엮어 만든 여승의 모자) 등을 얻어 스님 행세를 한 김상옥은 경찰의 추격에 혼란을 주기 위해 짚신도 거꾸로 신고 무내미(현 강북구 수유리)에 있는 외가로 피신했다. 숨을 돌린 김상옥은 동지들에게 소식을 전하기 위해 당일 저녁 동소문 고개 성곽에서 형사 2명을 맞닥뜨렸지만 스님 행세로 무사히 통과했다.

 

김상옥이 찾아든 곳은 여자동지였던 이혜수의 집(종로구 효제동 73번지)이었다. 동지들과 연락이 닿은 김상옥은 자신의 건재를 알리고 이후 강원도에서 은신할 계획을 밝혔다.

하지만 동상을 치료한 뒤 떠나기로 결정한 22일 새벽 일제는 경찰 1000여명으로 이혜수의 집을 4중 포위해 ‘1인 전쟁’은 끝을 향하고 있었다. 아침 7시 경찰이 김상옥이 숨어있는 벽장 문을 열고 엉겁결에 권총을 발사했지만 오히려 김상옥이 응사한 탄환에 맞아 쓰러졌고 형사들은 마루와 마당으로 피해 도망갔다.

 

경찰의 움직임이 잠잠해지자 김상옥은 다락의 담벽을 차 벽을 뚫고 옆집인 효제동 74번지, 75번지를 지나 76번지로 피신했다. 76번지 집주인에게 쫓겨난 김상옥이 72번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동상 걸린 발가락 하나가 떨어져나갔다. 경찰은 아직 73번지에 김상옥이 있다고 판단했는데 어느새 72번지로 이동했다는 소식을 듣고 혀를 내두르면서 김상옥에게 항복을 권유했다. 시간을 번 김상옥은 탄환을 장전한 뒤 전투 준비를 마쳤다. 30분 정도 기다린 경찰은 총격을 개시,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건물 담벼락 깊숙히 몸을 숨긴 김상옥의 체포가 용의치 않자 경찰은 지붕으로 올라가 공격할 계획을 세웠지만, 김상옥은 지붕에 오른 경찰 2명을 잇따라 명중시켜 지붕 공격을 무산시켰다.

약이 오른 일본 경찰은 무차별 총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72번지 대문을 부순 경찰은 총을 난사해 마당 안팎은 연기가 자욱하고 살림살이들은 쉴 새 없이 깨져나갔다.

 

기선을 잡았다고 판단한 경찰은 72번지 정문과 뒷집인 74번지 판자벽을 통해 협공을 펼쳤지만 그는 탁월한 사격술을 뽐내며 양 손에 쥔 권총으로 3명을 쓰러뜨려 물러나게 만들었다. 이후 재차 경찰의 난사 공격을 받은 김상옥은 화장실로 몸을 피했다.

3시간 동안 경찰들을 농락하며 15명을 쓰러뜨린 혈전 속에 김상옥에게 남은 탄환은 단 1발뿐이었다.

넓적다리에 총알 11발을 맞은 김상옥은 입을 다물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복잡한 심경 속에 김상옥은 1922년 상하이를 떠날 때 동지에게 남긴 “나의 생사가 이번 거사에 달렸소. 만약 실패하면 내세에서 만나봅시다.

 

나는 자결하여 뜻을 지킬지언정 적의 포로가 되지는 않겠소”라는 말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눈을 질끈 감은 김상옥은 조국의 독립과 번영을 빌면서 자신의 머리를 향하여 방아쇠를 당겼다.

서울 한복판에서 단신으로 1000여명의 무장경찰과 3시간 이상 시가전을 벌였던 ‘일기당천(一騎當千)’, ‘비호장군’ 김상옥은 양 손에 권총을 꽉 쥐고 두 눈을 부릅 뜬 채 항일운동 사상 유일무이한 시가전을 마감했다.

 

                              폭탄 투척 현장엔 초라한 기념표석만…

                       김상옥 의사 항일투쟁 현장을 아들 김태운옹과 답사

 

▲ 부친 피신처를 가르키는 김태운옹 김 의사가 일본 경찰의 추격을 따돌린 뒤 피신한 서울 왕십리 안정사의 부엌을 양아들 김태운옹이 가리키고 있다. 김 의사는 이곳에서 생쌀로 허기진 배를 채웠다.

 

 


순국선열의 뜻을 기리는 건 후세들의 당연한 의무다. 안타깝게도 현실에서는 이들의 행적이 역사 교과서에만 한두 줄 언급된 채 잊혀져 버리는 예가 많다. 1923년 독립운동 탄압의 대명사인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혼자 11일간 일경과 총격전을 벌인 김상옥 의사의 사례가 그러하다. 취재팀은 김 의사의 양아들 김태운(80)옹과 함께 83년 전 그 현장을 답사해 봤다. 독립운동가들의 삶의 자취를 좇으면서 그들의 얼과 숨결을 느껴 보는 것은 유적 관리의 궁극적인 목표로 사회적 관심과 대책이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

 

83년 전 당시 경성(서울) 한복판에서 일본 경찰 1000여명과 맞서 11일간 ‘1인 전쟁’을 펼친 김상옥 의사의 자취를 좇아 가장 먼저 서울 강북구 수유동 수유시장 인근 김 의사의 외가 터를 찾았다. 김 의사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기 전 머물며 어머니로부터 폭탄을 건네받은 곳인데, 지금은 모텔촌으로 변해 의사의 자취를 찾기 어려웠다. 종로경찰서를 폭파하기 위해 집에 숨겨놓은 폭탄을 당일 아침 어머니에게서 건네받은 야산도 주택가로 변해 흔적조차 찾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김옹은 “10년 전에 왔을 때만 해도 찾을 수 있었는데, 이젠 정확한 위치가 어딘지 모르겠어”라며 연방 고개를 갸웃거렸다.  김 의사가 폭탄을 던진 종로경찰서로 향했다. 종로2가 SC제일은행 본점 옆 화단에 ‘초라한’ 기념표석 하나가 눈에 띄었다. 그나마 아무 표지 없는 것보다는 다행이었다.

하지만 김옹의 얼굴에는 못마땅한 표정이 역력했다. 폭탄 투척 당시 종로경찰서 위치가 이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당시 종로서는 지금의 서울YMCA와 밀레니엄타워 사이에 있는 장안빌딩 자리인데, 서울시 표석심의위원들이 철저한 고증 없이 표석을 엉뚱한 곳에 세웠다”고 지적했다.

이어 김 의사가 종로서 폭탄 투척 후 은신한 용산구 후암동, 일명 ‘삼판통 격전지’를 찾았다. 그곳엔 고급 빌라가 들어섰고 아무런 안내판도 없었다. 일본 형사들의 기습을 물리친 김 의사가 남산으로 달아나며 이용한 언덕길만 윤곽을 알아볼 정도였다.

 

김옹은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여기 은신처에 주택이 있었는데, 당국에서 사적지 지정을 미루는 바람에 주택업자가 땅을 사서 빌라를 지어 버렸다”고 설명했다.

경찰에 쫓기던 김 의사가 승려로 변장해 탈출하도록 도운 사찰 안정사(성동구 하왕십리2동)에도 그의 자취는 찾을 수 없었다. 그가 생쌀로 허기를 면했다는 부엌은 남아 있으나 김 의사와 관련된 표지가 전혀 없었다. 한 스님은 “일제 때 유명한 분이 이곳을 들렀다는 말을 노스님들에게서 귀동냥으로 들었을 뿐”이라고 했다.


 

▲ 수유동 외가 터 어머니로부터 폭탄을 건네받은 수유동 외가 터(현재 모텔촌) (왼쪽), 옛 종로경찰서 터 폭탄을 투척했던 옛 종로경찰서 자리(현재 장안빌딩)

 

 

▲ 후암동 은신처 일경을 피해 은신했던 후암동 매형집(현재 대형 빌라) (왼쪽), 순국 현장 일경과 총격전을 벌인 끝에 자결한 효제동 순국 현장(현재 추어탕집).

 


김 의사가 경찰 1000여명을 상대로 3시간 동안 격전을 벌이다 순국한 종로구 효제동(당시 어의동) 현장은 좁은 골목 안에 있었다. 효제동은 김 의사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지만 위치를 알려주는 표석은 어디에도 없다.

기념사업회 측이 지난해 ‘광복60주년기념사업회’에 기념관 건립을 건의했지만 “우리는 ‘행사’만 주관할 뿐 기념관을 세우는 ‘사업’은 해당 사항이 없다”는 답변만 들었다고 한다.

이 지역에 앞으로 8차선 도로가 날 예정이어서 땅값 상승을 기대한 주변 집 주인들도 유적지 지정을 반대하고 있다.

김옹은 “사유재산권 행사를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공익을 생각지 않고 문전박대하는 세태가 야속하다”며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희생했느냐는 자괴감마저 든다”고 말끝을 흐렸다.

꼭 기념관으로 만들지 않더라도 최소한 안내판이나 표석이라도 제대로 세운다면 훨씬 많은 사람들에게 일제 치하 유일무이한 항일 총격전을 알릴 수 있을 것이란 아쉬움이 느껴졌다. 답사를 마친 김옹은 서울역 앞에서 헤어지면서 “조국을 위해 희생한 선열의 고귀한 유산들을 외면하는 현실 앞에 좌절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출처 : 김해김씨 삼현파(판도판서공 휘 관파)
글쓴이 : 서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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